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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채채채 Apr 03. 2019

건축과 도시, 그리고 내 이야기

유현준, 2015.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http://m.book.daum.net/mobile/detail/book.do?bookid=KOR9788932472959

건축과 도시, 그리고 내 이야기

- 유현준, 2015.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들어가자!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학적 시선'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답게 정말 도시, 그리고 이와 관련된 현상에 대해 흥미로운 인문학적 생각의 주제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깊게,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단 간단하게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해석의 '아이디어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도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인지라, 나도 나의 경험과 결부시켜 책을 읽어갈 수 있었다. 나의 생각을 자극했던 책 속 등장하는 몇 가지 주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골목이 사라진 도시에 대한 아쉬움


  "골목은 없고 복도만 있다"라는 소제목으로 소개 되었다. 오늘날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면 세대와 세대가 골목이 아닌 복도로 연결되어있다. 골목과 복도의 차이는 하늘이 보이는지의 여부이다. 오늘날 다른 집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보고 이동하는 골목이 아닌 꽉 막힌 복도를 통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골목이 복도로 대체되면서 자연도 내가 직접 만지고, 느끼는 자연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건물 안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바라보는 자연이 되었다.

  한편, 오늘날 아파트가 아닌 단독 주택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골목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다. 예전에 골목은 이웃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의 장이었다고 한다. 골목길에서 축구하고 공기놀이하고, 동네 평상에서 주민들이 모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마이카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살아 숨쉬는 골목길이 많이 사라지고 차가 지날 수 있는 넓은 포장 도로가 생겼다. 이러한 도로 위에서는 공기놀이도 할 수 없고 축구를 할 수도 없으며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렵다.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당이 있던 집들도 마당을 시멘트로 덮어 주차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한 골목. 골목에서 이웃간의 이런저런 소통이 등장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컸다. 4년 전 네덜란드 Leiden에 갔었다. 4년 전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것은, Leiden의 거리를 걸으면서 봤던 한 여성분이었다. 본인의 집 앞에 간이의자를 펼쳐놓고 선글라스를 끼고 책을 읽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워보일 수 없었다. 정말 그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보여서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평화롭게 독서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장소였다. 우리 집 앞에는 복도가 있을 뿐이고, 집 안에서 바라보는 자연만이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내가 자연을 느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네덜란드 Leiden, 집 앞에서 햇살을 받으면서 선글라스 끼고 책 읽고 싶다.

  자연을 느끼면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각잡고 나가서 한강공원에 가든지, 근교에 있는 자연이 어우러진 카페를 가든지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그냥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시간이 남을 때 자연과 함께 여가를 보내기란 쉽지 않은 환경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요즈음 미세먼지로 인해 푸른 하늘만 봐도 행복해하는 사람들 투성이인 것을 보면 사람들은 정말 맑은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함을 느끼는 듯 하다(물론 나도 정말정말 그렇다.. 자연이 제일 좋다.. 하늘만 봐도 행복하고 노을만 봐도 행복하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자연을 돌려주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욱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예술이란?


  나의 마음을 울렸던 책 본문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겠다.


필자는 예술을 ‘인간의 감정을 일으키는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마음속이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다가도 어떤 노래를 듣거나 소설을 읽으면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솟아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과 자신의 인간됨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배불리 먹고 잘 잤다고 인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가슴속에 무엇이 됐든 감정이 솟아날 때 비로소 인간됨을 느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은 감정을 일으켜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00원을 지불하고서 디지털 음원을 구입하는 이유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원하는 감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음악 시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이 사람을 살아있다고 느끼는게 하는가? 필자는 "가슴 속에 무엇이 됐든 감정이 솟아날 때 비로소 인간됨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이야기한다.


  올해 초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을 때 위와 같은 감정이 들었다. 당시 사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랑이 내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럴 때 즈음 위의 소설을 읽었다. 위 소설에서는 사랑의 힘을 엄청나게 대단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생활'이고,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삶'이 된다고...


http://m.book.daum.net/mobile/detail/book.do?bookid=KOR9788959133918

  
  당시 어렴풋이 사랑의 중요성, 사랑의 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연한 느낌 정도였었다. 위의 소설을 읽고, '아 내가 느끼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깨달았다. 마음 속 어렴풋함을 소설을 통해서 구체화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었고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연하게 느끼는 감정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고 또 작가의 능력이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시금 사랑의 감정이 끌어오를 수 있게 해 주어서, 내가 모르던 나의 감정을 일깨워줘서, 더 확장시켜줘서 작가에게 고마웠고 또 이러한 깨달음을 느낀 순간 무척 행복했다.


  예술이 없어도 '생활'을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의, 식, 주의 물리적 부분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까. 그러나 '삶'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산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를 생각한다면, 인생에 플러스 알파를 해 주는 것, 흑백 인생을 다채롭게 색칠해주는 것은 예술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건축으로 돌아와서... 어떤 곳이든 몸 뉘일 곳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집이 되지만, 집에 햇빛이 어떻게 비추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떠한지, 확 트여있는 공간이 있어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집 속에서 어떠한 경험을 할 수 있는지 등의 공간에 대한 예술적 사고가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삶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이 건축일 것이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이 인상적이다.


  건축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직접 인용하며 이 부분을 마치고자 한다.


"유럽의 여러 국가는 대표적인 건축물과 건축가를 둘 다 가진 문화 선진국이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을 저급한 노동 행위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만이 지식산업이 아니다. 건축 설계 작업도 나라를 세우는 중요한 지식 산업이다. 클래식 음악, 그림, 조각만이 예술이 아니다. 건축도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담아 후대에 남겨주는 예술이고 문화고 정신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


  본문에서 필자가 인용한 앤드류 스마트의 《뇌의 배신》에서는 "사람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멍 때리거나 명상을 하거나 빈둥거릴 때, 즉 뇌의 상태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되었을 때 창의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창의적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 설정된 목표와 시간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스마트폰을 계속 보면서 무언가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창의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공간이 창의성,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일까? 필자는 천장이 높은 종교 건축에 들어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상상을 하게 된다고 한다.  빈 공간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굉장히 공감갔다.

  나도 이런 저런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들이 있다. 지하철을 탈 때가 아닌 버스를 탈 때이다. 난 항상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평화롭고 여유롭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지하철을 타면 바라볼 풍경도 없고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생각해보니 이러한 나의 경험도 위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리라. 창가에 앉아 있으면 버스에서의 시야는 창문 밖까지 나아갈 수 있다. 자연히 넓은 공간을 볼 수 있다보니, 편안하게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도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 새로 지은 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은 천장이 매우 높았다. 그러다보니 공부하다가 잠시 멍때릴 때 자연스레 눈이 비어있는 천장으로 향했다. 이 때 정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멍 때리기, 상상하기, 생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창의성으로 직결된다고 하는데, 창의성도 중요하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멍 때리는 순간, 상상하는 순간 자체가 행복을 주기 때문에 이것 만으로도 만족한다. 이러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데에는 공간적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앞으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 관정도서관 8층 열람실. 천장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출처 : 서울대 도서관 친구들, <http://friends.snu.ac.kr>.



우리나라 교육은 건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교육?


  필자는 머릿말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교육은 건축을 하기에 참 좋은 교육 환경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워낙 다양하고 많은 과목을 어려서 다 배우기 때문이다. 필자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21개 과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서 말했듯이 건축물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이성적, 감성적 행동들의 결집체이다. 그래서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도 좋지만 그보다는 깊지 않더라도 넓게 다각도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고등학교 때 21개 과목을 배운 우리 국민은 건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교육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에게 적용해보면 맞는 이야기여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문과'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때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기술·가정, 음악, 미술, 체육 등 여러 과목을 함께 배웠기 때문에,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얼핏 '들어본 지식'들은 꽤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과학적인 이야기가 나와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배웠던 내용이 일상에 적용되는 것을 느낄 때에는 꽤나 쾌감을 느낀다.

  나의 전공인 사회학도 건축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자체는 학문적 과목처럼 구분되어있지 않고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여있기 때문에, 사회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하는 사회학은 하나하나 깊게 파고들지는 않더라도 넓게 다각도에서 보는 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어느정도 이에 필요한 '지식'을 배울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이 옳은 교육인지는 아직 나의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이 나에게는 맞았을 지언정 모든 사람에게 맞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을 바탕으로 현상을 이해할때 희열을 느끼지는 않는다.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데에 결국 도움이 되는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식을 배우는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면 성공한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문적 지식이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데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는 '학문'에 불과하니 실용적 지식을 위주로 배워야 할 것인가?

  교육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교육의 방식일지언대, 방식 측면에서도 어떤 방식이 옳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매번 사회 문제가 대두될 때 교육에 그 책임을 돌리고 교육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고 교육을 개혁하고자 하는데, 교육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 그 개혁의 방향은 옳은지, 과연 효과적일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주입식 교육이 문제라 하는데, 그렇다면 기초적인 지식들은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애초에 기초적인 지식, 학문의 토대는 어느 범위로 설정해야 하는가? 초, 중, 고등학교 단계별로 방식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전공이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인 듯 싶다.

  그러다보니 너무도 쉽게 교육 개혁책을 내놓는 사람들이 밉기도 하다. 정답이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이 역시 입장과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이기에, 깊은 대화를 통해 상호 합의점을 모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렵다. 그치만 어렵다고 묻어두기보다는 나도 어서 나만의 가치관을 정립해서 토론에 참여해야겠다.



나가자!


  이 책을 두고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진다며 비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물론 학술 연구야 통제된 연구를 통해 가설을 확립해야겠지만, 이 책은 학술 연구 서적이 아닌 대중들을 위한 인문 사회 서적이기에 이러한 엄밀성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나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웠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었다. 원래 책을 읽으면 책에 언급된 이야기를 단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러한 생각들을 적어두자!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썼다. 책은 항상 읽기를 시작할 때까지는 큰 결단(?)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배신하지 않는 듯 하다. 읽는 중간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행복하고 읽고 나서도 뿌듯함과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책의 내용 및 이로부터 파생된 나의 생각은 여기까지 정리해보겠다. 크 드디어 글 하나를 다 썼다. 다시금 느끼지만 생각하는 것과 글로 옮기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이다.. 고생했당!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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