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브릿마리, 여기 있다》를 읽고
* 본 글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브릿마리, 여기 있다》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으며, 이에 스토리상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든 인용구의 출처는 "프레드릭 배크만(2016), 《브릿마리 여기 있다》, 다산책방." 입니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2020년 말에서 2021년 1월까지 읽은 책이다. 《오베라는 남자》로 유명한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장편 소설로, 조금씩 읽다 보니 생각보다 완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브릿마리의 도전과 변화, 그리고 축구 이야기가 크게 인상 깊었던 책이다.
주인공인 브릿마리는 63세의 여성으로, 고집스러운 성격에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이 있으며 타인에게도 너그럽지 못하다. 이에 다소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그러한 인물이다.
브릿마리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에 살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편 켄트가 바깥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항상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필요한 물품들도 구비해놓는다. 그녀에게는 남편 켄트의 말이 진리이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집이 곧 그녀의 세상이다.
하지만 남편 켄트의 외도로 브릿마리의 세상은 흔들리고, 그녀는 기존의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 가게 된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듣도 보도 못한 시골 마을 '보르그'로 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브릿마리가 보르그라는 새로운 동네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63세 브릿마리의 따뜻한 변화가 마음을 울리기도 하며, 또 새로운 도전의 자극을 주기도 한다.
브릿마리의 변화를 이끈 요인에는 다양한 것이 있지만, 결코 작지 않은 요인이 바로 '축구'이다. 생각지도 못한 소설에서 축구가 등장해 처음에는 다소 놀라기도 했지만, 다 읽고 보니 축구만큼 또 순수한 열정의 것은 없으니, 축구를 바탕으로 이야기의 주요 얼개가 짜여지는 것이 굉장히 설득력있고, 자연스럽고 또 당연했다. 축구가 도대체 어떻길래, 얼마나 매력적이길래 그러한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공이 길거리를 굴러오면 발로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같다.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책의 가장 앞 페이지, 그리고 본문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구절이자, 나의 마음을 울린 구절이다. 우리가 왜 그렇게 축구에 빠져드는지를 가슴 뛰게 설명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서 우리가 축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위의 인용구처럼 축구는 우리의 본능과 가장 맞닿은 스포츠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이 길거리를 굴러올 때 발로 차고 싶지 않은가? 공을 차서 공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공을 차고 나면 마음이 벅차오르고 시원하지 않는가? 머리로 재고 따지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러한 기분 좋은 감정들을 본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축구의 매력은 축구는 곧 열정이라는 것이다.
벤이 골을 넣자 브릿마리는 고함을 지른다. 그녀의 발바닥이 스포츠 센터 바닥에서 솟구친다. 1월에 그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우주에서 그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축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묘사만으로도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직접 축구 경기에 뛰거나 경기를 관람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것이 월드컵인데, 평소에 축구에 크게 관심없던 사람이라도 일단 애정을 가지고 경기를 보게 되면 위와 같은 솟구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축구 아니고서야 일상에서 이렇게 가슴뛰고, 솟구치는 열정을 느낄 일이 있을까?
인간의 여러한 감정 중에 '열정'이 지니는 특징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다음의 인용구절은 열정의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열정은 어린애 같다. 진부하고 순수하다.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기에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를 뒤집어놓는다. 우리를 휩쓸고 간다. 다른 모든 감정은 이 땅의 소산이지만 열정은 우주에 거한다.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사회인인지라, 일에 대입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일을 열심히 하게 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이 일을, 이 공부를 열심히 해냈을 때 나에게 오는 사회·경제적 보상을 생각하면 일을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몰입하여 일을 열심히 해내는 것도 물론 매우 가치있고 대단한 일이지만, 이것이 곧 '열정'은 아니다.
열정은 보다 순수한 것이다. 머리로 재고 따져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본능적인 감정이기에 순수하다. 무언가 마음에 울림을 줄 때, 진정으로 마음에서부터 흥미가 우러나올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열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열정이 축구와 가장 어울리는 감정일 것이다. 순수한 열정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축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중략) ... 베가는 그 옆 변기에 앉아서 행복이 넘치는 목소리로 조잘거린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사람처럼 그런다. 수직으로 달릴 수 있을 것처럼 그런다.
브릿마리는 아직까지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서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을 만큼 기운이 팔팔한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매주 경기를 치르는 축구 팀도 있다지 않은가. 세상에 어떤 사람이 매주 자기 몸에 이런 짓을 기꺼이 저지를까.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응원하는 축구팀에 대한 설명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특성을 바탕으로 인물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리버풀을 응원하는 아이들은 항상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언제든지 역전할 수 있으니까. 기회가 있으니까. 이 아이들은 어떠한 역경이 와도 이겨낼 것이다.
그들(리버풀)은 3대 3 동점을 만들고 연장전까지 버틴 다음 승부차기에서 이겼다.
그 뒤로 리버풀을 응원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에겐 세상에 역전할 수 없는 일도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리버풀을 응원하는 아빠 밑에서 자라면 언제든 역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돼요. 아시잖아요! 그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이후로 말이에요."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소설 중 뱅크는 아버지를 묘사하며, 아버지가 토트넘의 팬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토트넘은 어떤 팀인가?
"토트넘은 나쁜 팀 중에서도 제일 나쁜 팀이에요. 왜냐하면 거의 잘하는 팀에 가깝거든요. 토트넘은 늘 환상적인 경기를 보여주곘다고 약속해요. 그런 식으로 희망을 심어줘요. 그래서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점점 더 기발한 방법으로 팬들을 실망시키죠."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뱅크는 토트넘과 팬의 관계를 아버지와 딸(본인)의 관계로 이어서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딸은 그가 좋아했던 팀과 늘 똑같았죠."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토트넘 팬이면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많게 되어있어요."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토트넘 팬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결과를 내지 않더라도 사랑한다. 그리고 새 시즌이 시작되면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으며 어김없이 상대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보여준다.
한편, 브릿마리의 남편 켄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다. 켄트는 항상 의기양양하며 자신의 생각이 진리인양, 세상을 주도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인가 뭔가를 응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중략)
"그 팀은 늘 이겨요. 그래서 자기들은 그럴 만한 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요."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하지만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켄트는 결국 자신의 잘못(외도)을 뉘우치고 브릿마리를 찾아와 돌아와달라고 사정한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켄트의 사업도 망했고, 켄트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브릿마리와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한다.
"다시 시작해야지. 원래 그러는 거 아냐? 옛날에는 나도 빈털터리였잖아, 기억 안 나?"
(중략)
"다시 그때의 그 남자로 돌아가면 돼, 여보."
(중략) ... 소도시와 보르그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을 때 브릿마리가 그를 돌아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다. 그는 껄껄대고 웃는다. 웃음소리가 정말이지 듣기 좋다.
"아, 망했어. 이렇게 엉망인 시즌은 20년을 통틀어서 처음이야. 조만간 단장이 잘릴 거야."
"어쩌다?"
"성공 비결을 잊어버렸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다시 시작해야지."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항상 성적이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는 있다. 새 시즌이 시작될 것이고 축구 팬은 어김없이 자신의 팀을 응원할 것이다.
"축구는 인생을 끌고 가는 힘이 있죠. 늘 새로운 경기가 있으니까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니까요. 모든 게 더 좋아질 거라는 꿈도 있고요. 경이로운 스포츠예요."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
열정이란 참 순수하고도 소중한 감정인데, 생각보다 일상에서 열정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열정을 비교적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축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축구는 본능과 닿아있기 때문에 축구를 하다보면, 축구를 보다보면 마음에서 솟구쳐오르는 열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축구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순수한 열정을 느끼는 소중한 기회를 가진사람이라 생각한다.
축구는 인생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지루한 일상에 열정을 주는 시즌이 매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 몰입하여 어느 팀을 응원하다보면 간절한 마음도 가지고 실망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망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또 새로운 경기가 시작되니 항상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기대하게 된다. 다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응원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축구 팬의 열정과 사랑이 드러난 K리그 축구 팬 박태하(2019)가 집필한 에세이, "괜찮고 괜찮을 나의 K리그"는 다음에 이어서 작성하고자 한다.
마음을 울렸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너희 어머니는 어느 축구팀을 응원하셨니?"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는 뻔하지 않느냐는 듯 씩 웃더니 어머니를 둔 아들들이 모두 그러듯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팀요."
- 프레드릭 배크만(2016),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