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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두두 Nov 24. 2022

김치 꿈나무

손 끝이 엄마의 김치를 기억하는 날까지.

엄마는 오랫동안 조리 일을 했다. 이제 거의 10년쯤 되었으려나.

워낙 손맛이 좋아 몇 년간 어린이집 조리사, 반찬가게를 거쳐 현재는 요양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있다. 100명쯤 되는 사람들의 밥을 매일 두세끼씩 차리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왜 주방에 남자들이 남는지, 나 또한 요식업에서 일을 해보면서 절실히 알게 되었다. 거긴 전쟁터다 진짜. (백패커 같은 일은 매일 하는 거니까)


이제 몇달 뒤면 환갑을 바라 보는 엄마의 몸은 오랫동안 조리일을 하면서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 양쪽 어깨 수술을 하고서도 엄마는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바로 또 일을 구해서 나갔다. 심지어 가장 큰 수술을 하고 몇개월간 어깨를 쓰지 못하는 동안에는 워드 자격증을 따러 다녔다. 어따 쓰지도 못할거면서. 결국 엄마는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징그럽다 징그러워 정말.


일을 옮겨갈 때마다 일의 강도는 더 세지는 듯 했다. 심지어 전화 통화를 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엄마가 메인으로 조리를 하는 날에는 새벽 4시 반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한다. 중간 중간 휴게 시간이 있어 누워서 쉬기도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늘 마음은 좋지 않다.


어린이 집과 반찬 가게에서 일할 땐, 그래도 오후엔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반찬 가게는 새벽 6시에 출근해 12시에 퇴근하는 그야말로 꿀직장이었다. 오후 시간이 보장이 되어 있으니까 그땐 놀러도 자주 다녔다. 가끔 집에 내려가 코가 비뚫어지게 늦잠을 자다보면, 퇴근해서 엄마가 키패드 누르는 소리에 깨기도 했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아주 철딱서니 없는 그림이지만, 육아의 최전선에 있던 그땐 친정에서라도 늘어지고 싶었다. 지금은 맘이 불편해 벌떡 벌떡 일어나지만.



김치가 똑 떨어졌다.

수시로 김치나 텃밭에서 키운 것들을 택배로 보내주던 엄마의 택배는, 네번째 옮겨간 직장을 다니고부터 뚝 끊겼다. 있을땐 작은 냉장고에 큰 통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없으면 또 아쉬운게 김치다. 늘 공짜로 받아 먹다가 사먹자니 괜한 돈 쓰는 것 같고, 삼삼한 시엄마의 김치는 손이 잘 안간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버티고 버티던 중 집으로 택배가 왔다. 하얀 스티로폼 박스였다. 엄마다. 예고도 없이 온 박스 안에는 온갖 채소들과 김치 두통이 들어 있었다. 김치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하나 건져 입으로 넣었다. 톡톡 쏘는 맛에 늘 감탄한다. 엄마의 김치에선 진정한 발효의 맛이 느껴진다. 엄마 김치는 갖다 팔고 싶은 맛이다. 나의 ‘언젠가’ 리스트엔 ‘엄마 김치 팔기’도 있다. 아마 그거 믿고 가게를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하는 말이 이러하다.

“시골에 제사 가기 전에 시간이 좀 남아서 김치 좀 담았어. 너네 김치 다 떨어질 때 됐잖아. ”

방금까지 김치를 보고 마냥 신났던 마음 아래로 욱하는 마음이 치고 올라온다.

“시간이 좀 남으면 쉬어야지! 뭘 또 해! 좀 쉬어 쉬어.”

“그거 얼마 되지도 않는다. 금방해 금방. 살짝 좀 짠것 같으니까 짜면은 무 좀 크게 썰어서 중간 중간 박아둬.”

“알겠어. 잘 먹을께~ 좀 무리 하지 말고 쉬어.”

늘 이런 식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 절대 안 쉴 사람.

집에 내려가면 쉴새 없이 움직이는 엄마를 보며, 나의 게으름을 반성한다. 쉬는 날에도 짬내서 자식들 보내줄 김치 담는 엄마.



토요일은 동생 결혼식이었다. 전날 준비할 것도 많고하니, 연속 3일을 연차를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장은 그때라는 것이다. 결혼식이 있는 그때.

금요일에 배추를 절이고, 토요일에 결혼식 다녀와서 양념소 만들고, 일요일에 버무린다. 라는 엄마의 계획. 이쯤되면 이건 뭐 김장 때문에 연차를 낸건가요.


금요일엔 워낙 바쁘다보니, 배추 절이기는 실패했다. 하지만 현관 앞에 쌓여 있는 배추 더미를 보며 진짜 하긴 하겠구나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결국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와 정확히 한시간 후부터 시작했다. 나는 마늘 한박스를 세시간 동안 까댔고, 엄마는 배추를 절이기 시작했다. 스텝 1부터 김장을 함께 한건 처음이었다.


남에게 부탁하거나 시키지 못하고 내가 직접 해야되는건 엄마를 닮은 것이 확실하다. 피곤해도 내가 하는게 편하지~ 하는 스스로 겁나게 피곤한 타입. 단 한번도 김장 좀 같이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먼저 엄마 김치도 좀 배울겸 도우려고 물어본게 하필 결혼식 날짜였던 것 뿐.

김장 하는 내내 엄마가 고작 나에게 시키는건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분리수거 하기, 김장통 씻기 이 정도였다. 무채라도 썰어 보려는 김치 꿈나무에게 아직 그 정도 레벨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 참 자존심 상하네.


그럼에도 일요일에 같이 배추를 버무리면서 내가 같이 하니까 수월하게 한다는 둥, 배추를 잘 버무린다는 둥, 그래도 요식업에 몸 좀 담았다고 좀 달라졌다는 둥, 예전이랑 다르다는 둥. 이렇게 김치 꿈나무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주었다.



앞으로 하얀 스티로폼 박스 안에 꽁꽁 묶인 비닐 안에 들어 있는 김치를 볼때마다 더 울컥할 것 같다. 이 좁은 주방에서 혼자 낑낑대며 김장 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왜 아빠는 안도와줬을 것 같지….아님 도우면서 엄청 구시렁댔겠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그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다. 엄마의 김치를 더이상 먹지 못하는 그런 날.

늘 본인의 엄마 김치를 얻어 먹기만 하던 시엄마는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한동안 김치를 사먹으셨다. 그리고 김치를 꺼낼 때마다 말씀하셨다. 할머니 김치가 진짜 맛있었다고. 몇년을 그렇게 할머니의 김치를 그리워 하시다, 몇년 전부터 어깨 너머로 배운 김치를 담기 시작하셨다.


나 역시 하얀 스티로폼 박스도, 엄마의 김치도 만나지 못하는 날을 만나겠지만 손 끝에서라도 엄마의 김치를 기억할 수 있도록 내년에도 김치 꿈나무는 김장에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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