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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Aug 09. 2018

초라해진 나에게

그때도 나였고 지금도 나인 것 인정하기

몇 시간만에 겨우 엉덩이를 붙여본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참기 힘든 폭염의 연속이다. 낮잠도 없이 하루종일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두 녀석을 겨우 재우고 나와 잠시 숨을 돌린다.


밤.

이제, 잠시, 나의, 자유시간이다.



큰 놈과 작은 놈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보내던 총 이주일의 여름방학이 드디어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삼시세끼 밥 차려 먹이고 중간중간 간식 먹여주고 키즈카페나 블럭방 같은 여가활동을 챙겨주는 '대수롭지 않아보이는' 일들만으로도 하루가 짧던 그 시간들에도 역시나 끝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시 등원을 시작한다 해서 일상이 뒤집어질만큼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기관에서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올 뿐, 두 아이의 아침밥과 저녁밥은 역시 온전히 내 두 손에 책임지어져 있다. 매일 두 아이의 등원과 하원을 책임지고, 유치원 숙제를 시키고,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고, 몇가지 과외활동을 시키고, 씻기고, 재우고. 아이들을 길러내는 그 일은 올해 6세인 큰 아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또한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굴레의 연속이다.


그러던 중 큰 아이 6세, 작은 아이 4세가 된 올해에야 다시금 과거의 내 삶에 대해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마치 처음부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상당한 이질감에 휩싸인다. 당황스러웠다.



과거의 나

라고 정의하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직업이 있었고 그 일을 직면할 때는 늘 설렜다. 비교적 짧은 텀으로 하나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그 결과가 성공적일 때는 마약같은 성취감을, 실망스러울 때는 아쉬움과 오기를 선사해주는 그런 일이었다. 준비하던 기간의 막막함과 부담감은 끝날 때의 후련함으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결과가 어찌되든간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그 '종료'라는 매력 때문에 과정의 고난은 '노 프라블럼'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거침이 없었고 생기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매사에 재미를 느꼈고 내 삶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용기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최근의 나


그런데 말이다.


임신과 출산에서부터 이어진 지금의 일상은 어찌보면 '종료'나 '성취감' 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집안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 안나고, 조금만 손을 놓으면 티가 팍팍 나는게 집안일이다. 육아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은 내 아이들을 길러내고 돌봐주고 챙겨주는 일에 '끝'이란 것은 없을 것이며, 회사 업무 프로젝트를 끝내듯 명확히 구분된 단위나 마디도 육아라는 카테고리에서는 그닥 찾기 어렵다. 적어도 육아에서 '종료'란 개념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성취감'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자존감이 별로다. 나는 없고 애들 엄마만 있다.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뭔지 모를 무기력함이 슬그머니 나를 따라다닌다. 애들을 데리고 다닐 때면 당당한 모습보단 초라하거나 안절부절한 모습일 때가 많다. 늘 동동거렸다. 그런 나를 인정하기 싫었다. 극복할 뭔가 필요했다.





내가 좋아하던 '글쓰는 일'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 지나가버릴 내 안의 이야기를 조금씩 옮겨놓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을 것 같기에.

그러다보면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상황이 좀 바뀌었을 뿐,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자신이 생길 것도 같아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내가 다시 좋아질 것 같으므로.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2018년 뜨거운 여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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