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 Jan 16. 2019

그게 왜 낭비야, 낭만이지

아무 이유도 필요없었던 그 시절의 낭만이 그리운 날.


-그냥 좀 똑바로 걸으면 안될까?


내 손을 잡고 걷는 아이의 발걸음이, 아니 겅중겅중 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한 과격한 발놀림이 계속된다. 흰색 블럭들 사이사이에 첨가된 까만색 블럭만 밟으려는 개구진 몸짓에 녀석의 손을 맞잡은 내 손까지 출렁거린다. 그까짓 선 좀 밟으면 큰일이 나는 듯 녀석은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신이 났다. 내 입에서는 어김없이 잔소리가 흘러나온다.

-싫어, 재밌단 말이야.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흡사 노루뜀을 이어간다. 5분이면 갈 거리를 10분째 걷는 것 같다.


재미.

...그래, 재미.



문득 어릴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우리집에서 당시의 내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렸다. 책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경쾌하게 걸어다니던 어린 나. 습관적으로 신경쓰는 루틴이 있었다. 어떤 날은 횡단보도의 검은 부분만 밟으며 걷고, 어느 날은 흰 부분만 밟았다. 보도블럭의 모양에 따라 금을 밟지 않으려 좁게 걸어도 보고, 보폭이 넘치면 점프를 하며 나아가야 하기도 했다. 때로는 색깔이 있는 블럭만 밟으려 발꿈치를 들고 걷거나, 지그재그의 불안한 귀갓길도 불사해야 했다. 녀석처럼 그 때의 나도 그랬다. 발걸음은 낭비되었을지언정 그 아무것도 아닌 게 재미있었다. 나름의 낭만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개구리 올챙이적 기억이었다. 그냥 좋아서 했던 비효율적, 비생산적 행위.





커피를 내려 한 모금 마셨다. 입에서 쓴 그것이 맛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나는.


지금 나에게 단지 재미만을 위해서 헛걸음도 마다않는 행위가 있던가. 단 몇 걸음의 낭비도 없이 딱 필요한 걸음수까지만 경제적으로. 특별한 목적없이 '그냥' 갈 길을 멀리 돌아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걸음 뿐이 아니다. 스스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면서부터는 이미 부지불식간에 효율성을 따지는 사고가 머리에 익었을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대단히 계산적인 인간 같지만, 사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언제부턴가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들에 여유가 없어져가고 있는지 모른다. 물질도, 마음도.



더 이상의 감정낭비는 하고 싶지 않아.


그것은 감정의 소통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점점 우리는 조금의 버려지(는 것이라 불리)는 감정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딘가에 닿아 기대한 효과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훗날 그 때의 감정을 '낭비됐다', '버려졌다'고 치부해 버리기 일쑤다.


나도 그랬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돈도 그 어떤 물질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을 손해보지 않으려는 '감정 낭비'에 대한 두려움을 품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주고, 그 마음을 다 주고 나면 훗날 결과론적으로 '불필요했다'고, '헛되었다'고 평가될 까봐. 실패한 관계에 소모된 무용한 감정으로 취급될 까봐. 아끼게 되고 남겨놓게 되는 것.



우린 왜 헛된 것을 두려워할까.
진짜 '헛된' 것이 있기나 할까.
'낭비된 감정'이라는 말이 성립하긴 할까.


때로는 마음에 솔직한 사람이 미련스러워 보여도,

우리의 낭만은 사실 그런 지점에서 시작되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녀석은 이제 겨우 7살. 시시해 보여도 그냥 자기 마음에 충실한 사람으로 크는 것도 좋겠다 싶어졌다. 벌써부터 5분이면 갈 거리를 10분동안 걷는다고 일장연설하지 말자 다짐해 본다. 걷는 길이든 감정이든 그 무엇이든, 남는지 모자라는지 계산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마음이 원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용기있는 어른으로 자란다면, 이런 겁쟁이 같은 나보다 나은 제법 사람다운 사람일 테니까.


집 근처 상가에 다녀오는 길에 아주 오랜만에 '횡단보도 금 밟지 않기'를 해봤다. 우스꽝스럽고 어색해 몇 걸음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미쳤네, 나이 먹고 이게 뭔 짓이야. 중얼거렸지만 슬그머니 미소가 삐져나왔다. 이런 것 아니어도, 누구든 하잘 것 없는 작은 재미쯤은 가지고 살아도 나쁘지 않겠지. 헛되어 보이지만 나만의 낭만이라 부를 수 있는 작은 의미만 있다면 결코 헛되지 않은.




2019년 1월

겨울의 한가운데 어디쯤에서

산책.

매거진의 이전글 도미노 게임을 받아들이는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