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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Aug 10. 2018

고도는 죽음인가? 혹은 구원인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992년 보스니아가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사라예보에 폭격이 가해졌다. 이후 25만 명이라는 희생자를 남기며 보스니아를 '유럽의 킬링필드'로 불리게 한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93년, 사라예보의 한 지하실, 박격포 소음이 울리는 어둠을 밝히며 연극 무대의 막이 올랐다. 수전 손택이 주도한 <고도를 기다리며>이었다. 내전소식을 들은 수전 손택이 사라예보로 날아가 한 행동이 하필이면 연극이라는 사실이 미디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고도는 죽음인가? 혹은 구원인가?


수전 손택, 사라예보에서. ©https://www.dooneyscafe.com/tag/susan-sontag


이방인, 부조리하다


부조리라는 용어는 카뮈가 자신의 저서 <시시포스 신화>에서 인간을 정의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했던 용어다.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데, 그 바위는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형벌이 영원히 되풀이된다. 카뮈는 '아무것도 성취해낼 수 없는 일에 온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벌을 반복하는 시시포스를 '부조리한 영웅'이라고 부른다. 노동과 권태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간을 은유하는 시시포스 신화를 통해, 카뮈는 인간이 지니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을 부조리라 명명한다.


시지프스, 티치아노, 1548-49. 캔버스에 유채, 237 x 216 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타난 부조리성은 권태로부터 비롯되고 죽음을 인식할 때 생성되며 스스로 이방인으로 존재함을 깨달았을 때, 인간 상호 간의 소외감을 느꼈을 때 드러난다. 권태는 인간의 존재 가치와 목적에 회의를 느끼는 기계적인 삶의 반복에서 오며,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인간은 시간 앞에 파괴되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은 세계 속에 내팽개쳐져 있음을 깨달았을 때, 소외감은 인간의 비인간성과 잔인성으로 인해 인간 상호 간 남겨진 감정이 그것뿐임을 느꼈을 때 드러난다.


실존적 절망, 부조리극


부조리극의 탄생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서구 지성인들의 지적 태도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언한 이래 가치기준이 되어야 할 신의 부재를 실증하듯이 2차 세계대전은 맹목적인 대량학살을 통해 인간의 비인간화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지구 종말에 대한 위기감을 극도로 고조시켰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고발과 증언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성과 역사의 발전, 신의 권능은 철저하게 붕괴되었고 인간은 절대가치 기준을 상실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후 남은 진실은 신의 부재로 인한 혼돈과 공허함 속에서 버림받은 인간의 실존적인 절망뿐이었다.


베케트를 위시하여 아다모프, 주네, 이오네스코, 뒤렌마트, 올비, 핀터를 비롯한 부조리극 작가들은 종래의 연극이 갖는 논리적인 구조와 갈등을 비논리적인 구조와 발화로 전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부조리극작가들은 인간의 존재 가치를 탐구하며 철학적인 숙고를 거듭하였고 체제와 관습의 굴레를 벗어난 인간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구조가 붕괴된 세계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일련의 시도들이었다.


이안 맥켈런과 패트릭 스튜어트가 고고와 디디를 연기한다. ©http://variety.com


침묵, 움직이지 않음


종래의 연극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합리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과 달리 <고도를 기다리며>는 불합리성을 불합리한 그대로 표현한다. 이를 위해 사무엘 베케트는 전통적인 플롯의 사용을 거부했다. 종래의 드라마는 긴장감을 이끌어내어 카타르시스에 달하는 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게끔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는 개연성 없는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극의 구조 전체를 조망하게끔 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침묵'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면서 작품은 언어 외의 것을 획득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움직이지 않는' 행동의 반복이 어떤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 행위가 작품 전체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시적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곳은 논리와 질서가 배제된 세계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기다리는 고도의 부재가 짙어지는 세계다.


선험적인 근거를 상실하여 아무런 가치체계를 부여할 수 없게 된 삶을 맞닥뜨리며, 이러한 삶에 대한 표현을 찾으려 애쓴다. 그리고 고도는 나에게 무엇인지 생각한다. 우리에게 무엇인지 생각한다. 고립과 절망 속에서의 기다림. 기다림이라는 행위에 담긴 무기력을 모두가 겪고 있다는 것, 그것만큼은 같다. 고도를 기다리는 침묵의 무게가 사라예보의 폐허에, 생 쿠엔틴의 교도소에, 우리들 마음에 무겁게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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