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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겨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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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Dec 02. 2019

겨울과의 동거

"겨울아, 겨울아"



 우리 집에 ‘겨울’이 산다. 그와 같이 산지는 1년 8개월 정도 됐다. 겨울과 함께 산다는 건 나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생판 모르던 존재와 한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건, 부러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도 않았을 일이니까.


 겨울의 몸은 하얀색 털과 까만색 털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 비싼 밥을 먹어서인지 털이 매우 부드럽다. 풍성한 털 때문에 몸집이 커 보이지만, 실은 마른 편이어서 안아 들면 신기루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다. 눈은 짙은 갈색을, 코와 발바닥은 분홍색을 띤다. 동족들과 비교하자면  사교적인 성격이라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고 말이 많은 편이다. 동족이란, 고양이를 말한다.


 겨울을 왜 겨울이라고 부르게 됐냐 하면 ‘겨울아이’ 곡의 가사처럼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집에 온 것도 겨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도 겨울. 무엇보다 겨울이가 겨울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원래 이름은 ‘안개’였다. 애기 때부터 골격이 여리여리하고 은근히 분위기가 있는 고양이였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겨울은 우리 집에 온 첫날부터 내 옆에만 붙어있었다. 쪼그만 게 뭘 안다고. 내가 겨울의 전부가 된 것이었다. 그 사실이 벅차서 안달 난 마음으로 살았다.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건 생각보다 더 놀라운 경험이다. 서로의 생활 패턴을 공유하고 습관을 알게 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소한 취향까지도 알아가게 된다. 어디에서 잠드는 걸 좋아하는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지, 편한 자세가 무엇인지, 물은 어떤 그릇에 주면 더 잘 마시는지,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목소리는 어떻게 다른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겨울이 우리 집에서 지낸 지 오래됐지만, 생각보다 그가 가진 물건은 별 게 없다. 작은 화장실과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 쓰는 그릇 몇 개, 스트레스를 해소해줄 스크래처, 병원 갈 때 사용하는 이동식 케이지, 심심함을 달래줄 장난감들-잠자리 모형이 달린 낚싯대와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던 쥐 인형 막대기, 조종이 가능한 실제 쥐 모형 장난감, 쥐 모양 오뚝이…. (겨울이 실제로 쥐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냥이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조촐한 겨울의 살림을 보고 있으면 고급스러운 캣타워 하나 못 사준 내가 미워진다. 월세방을 전전하는 내가, 안정적이지 못 한 삶을 사는 내가, 한 생명을 덜컥 책임진다고 데려온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겨울은 나의 자책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길을 간다. 냉장고와 책꽂이 위에 자유자재로 올라가 드러눕고, 창밖을 보며 사색(?)하고,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장난감으로 만든다. 집 안에 존재하는 아늑한 구석은 모두 그의 침실이 되곤 한다.


 겨울은 맨몸으로 곁에 와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아니, 주고 있다. 내가 집에 돌아오면 예외 없이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는데, 자다가도 털이 짜부라진 상태로 걸어 나와 잠긴 목소리로 ‘냐-’ 인사를 한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힘든 하루 끝에 침대에 누우면 겨울은 내 배 위로 올라와 품에 안기는데, 그게 마치 스마트폰 무선충전의 원리처럼 내가 충전되는 기분이다. 잠이 안 올 때면 침대를 더듬거리며 옆에 누워있는 겨울을 찾기도 한다. 손바닥에 털이 닿으면 마음이 확 놓인다. 어느 슬픈 밤엔 겨울을 품에 안은 채 엉엉 울었더니 눈물을 보곤 화들짝 놀라 도망가 나를 울다 웃게 만들기도 했다.


 겨울과 함께 살면서 달라진 건, 애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눈을 바라보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으로 ‘정말 정말 사랑해, 알지?’라고 말하면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라고 믿게 된다. 눈빛에 진심을 담아 바라보면 알아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진짜라고 느끼게 된다. 겨울의 마음이 나에게 닿아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의 그윽한 눈을 마주치거나 내가 집을 나설 때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최근에는 내 생일날 집에 친한 동생이 잠시 놀러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 얘길 꺼냈다. “언니, 요즘 고양이 털 정전기 심하지 않아? 무릎에라도 올라오면 난리도 아니야.” 정전기는 못 느껴봤는데… 아니, 그것보다 겨울이 언제 마지막으로 내 무릎 위에 올라왔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리 겨울이는 애기 때 이후로는 무릎에 잘 안 올라오던데.” 그러자 동생은 깜짝 놀라며, “아, 진짜? 레이(동생이 키우는 고양이)는 아직도 무릎 냥인데.” 했다. 나는 겨울이 언제 이렇게 부쩍 컸나 싶었다. “레이가 더 엉아인데, 겨울이 보다 더 애기 같네~” 하고는 살짝 부러운 티를 냈다.


 너무 빨리 커버린 겨울에게 서운함이 조금 들었다. 그런데 동생이 떠나고 난 뒤 겨울이 초조하게 내 주변을 서성거리며 한참을 냥냥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옆에 슬쩍 앉았더니, 웬일로 무릎에 척척 올라와 커버린 몸을 욱여넣어 무릎에 앉아주는 게 아닌가. 마치 ‘그런 게 다 서운했냐? 옜다! 생일 선물로 한 번 해준다.’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무릎 위에서 그릉그릉 소릴 내며 앉아있어 주었다. 어떨 때는 내가 겨울을 키우는 게 아니라, 겨울이 나를 키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매일 겨울을 부르며 산다. “겨울아, 겨울아.” 

사계절을 겨울 속에서 산다. 이제 겨울은 계절의 의미보다, 가족의 의미로 짙어졌다. 겨울과 함께한 날들이 길어질수록 한쪽 가슴이 조금 시려오긴 하지만, 나에게 겨울은 충분히 따뜻한 단어가 됐다. 외로움을 잊게 만드는 주문이 됐다. “겨울아, 겨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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