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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May 09. 2020

이토록 충동적인 시작

시작은 가까운 곳에 늘 도사리고 있을지도.



터미널로 향하는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 짐칸에 트렁크를 싣고 버스에 올랐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17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버스 좌석에 몸을 편안히 기대어 앉았다. 곧 버스가 기분 좋게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집에 간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한없이 느슨해졌다. 창밖으로 회색빛에 잠긴 도로 풍경이 마스킹 테이프처럼 똑같은 패턴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걸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가슴속에 전류가 살짝 흐르더니 몸에 긴장감이 돌며 마음속 전등의 스위치가 딸칵- 켜졌다.


나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검색어는 ‘다큐멘터리 작가’에서 ‘방송 작가’로 이어졌다. 검색 결과 창에 ‘방송작가 아카데미’ 사이트 링크와 ‘방송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등의 지식인 질문, 대중에게 소개된 방송작가의 인터뷰, 관련 서적, 직업 소개 포스팅 목록이 화면을 채웠다. 집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나는 전투적으로 자료를 찾고, 읽었다. 고속도로 정체가 풀리듯 머릿속이 시원하게 뻥 뚫렸다. 목적지가 결정된 내비게이션처럼 빠르게 경로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기 전, 나는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방송작가가 되기로.


순식간에 불타오른 마음이었다.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중대한 결정을 살면서 몇 번이나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이건 첫 챕터를 장식할만한 큰 결정이었다.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열망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몸이 뜨거웠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랑에 빠지면 오직 그 존재밖에 안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굉장히 무모한 짓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그게 무엇인지 공개하기 전에 우선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나의 전공은 문화재 보존과학이었다. 문화재를 수리하고 복원하는 학문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소설 ‘낭만과 열정 사이’의 남자 주인공의 직업,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배우 김래원이 소화한 역할을 떠올리면 비슷하다. 현실과는 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전공을 살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부터 보존처리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달간의 휴가 이후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심지어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 석사 과정에 진학하기로 교수님과 이미 논의가 끝난 상황이었다.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4년 동안 공부해온 전공과 앞으로의 계획을 몽땅 뒤집어엎기로 결심했다.


내 마음에 불을 밝힌 전류는 파리에서부터 줄곧 몸속을 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전류는 여행 기간 내내 묵었던 한 숙소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인 여자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조용한 가정집 분위기 덕에 마음 편히 묵을 수 있었다. 그때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나보다 나이가 몇 살쯤 많은 언니였다. 이사할 집의 입주 기간까지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 붕 뜬 바람에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다고 했다. 같은 공간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


그날은 와인을 맛나게 나눠 마시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밤이었을 거다. 내가 글 쓰는 것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는, 꿈에 관한 얘기도 털어놓게 됐다. 여행 중에는 내밀한 감정도 선뜻 밖으로 꺼내놓기 마련이다. 한동안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언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얘길 꺼냈다. “네 얘기를 듣다 보니까 생각이 난 건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다큐멘터리 작가가 있어. 너 그거 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에 붙어있던 그림


그때까지만 해도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알려지지도 않았고, 확 와 닿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 그런가요?”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행 내내 그 얘기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난데없이 그 말이 훅 떠오른 것이다. 나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글과 닿아있는 직업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키웠던 것 같다. 막연하게는 ‘작가’라는 직함을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언니가 인생의 핸들을 꺾어야 할 때 나타나 도와주는 신(?) 같은 존재였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답은 내 안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행하는 동안, 내 인생이 이대로 결정되는 건가? 이 일이 나와 잘 맞는 걸까? 그냥 흐르는 대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왠지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30년 후의 내 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아서 갑갑하기도 했다. 나의 선택이 도전이었는지, 도피였는지 지금의 나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들뜨고 설렜다. 첫 직장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긴장감과 황홀감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로 방송 일을 시작한 나는 대선배님들과 함께 일했다. 그중 시인이기도 했던 선배님이 쓰는 대본은 완전 최고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입혀진 내레이션은 그 자체로 시였고 한 편의 수필이었다.


달콤한 시작과는 달리 방송 세계는 혹독했다. 쓴맛이 너무 강해서 사레에 들릴 지경이었다. 첫 프로그램에서 90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몸과 마음을 탈탈 털어 일했다. (80만 원을 주는 곳도 허다했는데 그나마 더 챙겨주는 곳이었다.) 이 돈으로 월세를 내고 교통비와 생활비를 빼면 남는 것도 별로 없었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돈 쓸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돈이 모이기까지 했다. 바쁜 스케줄로 몸을 미처 챙기지 못해 건강이 많이 안 좋았던 날도 있었다. 그런데 시작의 강렬함 때문인지,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모를 감정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올해 서른 살이 된 나는 여전히 방송 작가로 살고 있다. 그때의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비록 충동적인 시작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은 가까운 곳에 늘 도사리고 있다고 믿게 됐다. 어쩌면 그 시작이라는 것은 나의 시선이 기회를 알아채고 자신을 조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이 있다. 될까 안 될까, 생각만 하고 있는 것보다 우선 저질러야 한다는 걸 안다. 나이를 먹으며 점점 겁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때 그날처럼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하고픈 것을 찾아 나서던 모습을 잃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단단하게 쌓아온 지난 시간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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