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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Feb 22. 2024

커플 운동화

오모나, 오글 거려!

엄마도 나도 그리 살가운 편은 아니다. 

이런 미지근한 표현말고  똑 뿌러지게 표현하자면

'전혀' 라는 부사를 첨가하는게 정확하겠다. 

살뜰하게 챙겨주고 예쁜 말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다.

함께 옷을 구경하거나 쇼핑을 함께 하거나 맛집을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각자의 일상과 생활 방식을 인정하고 방해하지 않으면서

오래 산 부부처럼 말 짧게 몇 마디 주고받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멀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먼 사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공동의 문제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전화를 주고받으며 해결하지만

끝이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의 일상으로 또한 후다닥 돌아간다.


엄마는 살가운 딸을 원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엄마 핑계 대면서 '엄마 닮은 딸'의 모습을 고수했다.

엄마한테 잘하는 것 역시 눈치를 본다.

살갑게 굴고 싶어도 나서지 못하는 성격은

사실 엄마 아빠의 교육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다 끼어 버린 내 운명일 수도 있고.


내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고 아래로 동생이 있다.

가운데 낀 내가 큰아들 큰 딸 노릇을 하면 안 된다는 것과

가운데 낀 내가 그 누구보다 튀면 안 되다는 것이

내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무의식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눅 들고 눈치 보는 행동의 잔재는 어찌 보면 

나의 태생적인 서열에서 기인한것일 수도 있다. 

난 유교걸이 아님에도, 부모 형제를 대할 때는 나도 모르게

삼강오륜까지는 아니더라고 장유유서의 정신이 발현되어

슬그머니 뒤로 빠진다. 엄마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그 조차도 순서를 눈치 본다.

이건 의무를 떠 넘긴다거나 도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오빠와 언니에 대한 나의 배려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엄마는 정서적인 지지를 나에게서 찾는다.

그녀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가 '불안' 이기에 

엄마의 불안을 고스란히 떠 앉는 역할을

참으로 자주 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제안하는 역할을 했기에

객관적인 '무덤덤'한 톤으로 자주 말했고

아마 그런 게 엄마를 안정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빠의 '씅질머리'를 닮아서 나도 꽤나 욱하고

한가닥 상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지만 서도.

(아직까지 해보지는 않았다, 다행이지!)



-엄마랑 딸이 커플템 한 거 보니까 보기 좋더라, 호호호


세상에 오글거려라... 엄마한테 그런 면이 있다니.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절대 그런 거 안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니 왜 커플이라는 것을 굳이 티를 내고 보여줘야 하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전쟁통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닮았는데 '제는 내 딸이고요, 저분은 엄마예요'라고 티 낼 필요도 없다!

커플템으로 은근슬쩍 속을 보다니....


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는 익명의 생활을 즐기는 나에게

커플템으로 여행지에서 엄마와 눈에 확 띄는 그런 모습은

어우, 생각만으로도 닭살 돋았다. 커플템을 하려면 아빠랑 하지 왜 나랑?!


하지만 그날 저녁, 색깔도 브랜드도 심지어 사이즈까지 똑같은

엄마에게 내가 생일 선물한  운동화 한 켤레는 내 신발장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같은 샵에서 같은 세일즈 스텝에게 구매한 완벽한 커플템이다.




-엄마 미세 먼지 심한데, 지하도 산책할까?


난 4월 제주 여행 때 엄마랑 커플템으로 깜짝 놀라게 해줄 운동화를 미리 신고

현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같은 운동화를 신은 걸 보며 엄마가 좋아할 걸로 기대하면서

엄마한테 어떤 표정으로 깜짝 놀라게 해 줄까 생각하고 있었다.


-마스크 쓰고 모자 쓰고 자외선 직접 받지 않으니까 괜찮아!

동대문 운동장에서 을지로 입구 지하도까지 슬렁슬렁 옛날 사람 티 내면서 걷자!


그날 계획한 번역 분량을 생각보다 빨리 끝내서 엄마한테 홀가분하게 제안했다.

얼마 전 엄마는 검버섯과 점과 잡티를 제거해 햇빛을 보지 못해 산책도 나가지 못하고 있어서

내가 먼저 엄마한테 나가자고 했는데, 그날 엄마는 이상하리 만큼 뭉그적 거렸다.

다른데 같으면 벌써 좋다고 나오셨을 텐데


-왜? 안 나와?

-아빠도 엄마랑 같이 점 뺐어. 아빠도 같이 나온다는데, 나 그냥 집에 있을래


아이코! 둘째 딸과 단독 데이트를 아빠가 눈치도 없이 방해하다니!


두 분이서 점 뺀 자리에 습윤 밴드를 서로 붙이네 때네

아프네 따갑네 투닥거리는 모습이 상상이 되어 큭큭 웃음이 나왔다.


그날 엄마는 아빠를 두고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계획했던 커플 운동화 서프라이즈를 하지 못했다.

고스란히 신발장안에 모셔두었다.

그리고는 책상에 앉아 다음날 번역분을 미리 당겨서 바지런히 작업을 했다.


'제주도는 어느 지역으로 갈까?

한 달이나 집을 비울 건데 엄마는 도대체 아빠를 어떻게 설득하려는 걸까?

주말에는 그래도 아빠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은 뭐지?

나 일도 해야 하는데, 나 일하는 동안 엄마는 뭐 하지? '


이런 잡념과 즐거운 상상으로 분량을 채워 가면서

봄에는 미세 먼지가 사라져서 제주 둘레길을 모두 완주하리라 생각했었다.


 

인생의 모든 회한은  ' ~ 했었어야만 했는데' 라는

빌어먹을 가정법에서 시작된다.

그날, 고집을 부려서라도 엄마한테 커플 운동화를 보여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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