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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Mar 30. 2024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는 안다  

무지와 미지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용기

나 사는 곳에는 길거리 포교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집을 나와  대로변으로 나오면 내 또래의 여성 대여섯 명들이 가판대를 펼쳐 놓고

그 주위에 서 있고 한 명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타로 무료로 봐드릴게요. 심리 검사도 무료고'

친절하게 웃는 듯 하지만 목소리는 파리지옥처럼 끈적하다.

처음에는 주변에 타로 센터가 오픈이라도 했는 듯했다.

하지만 여러 번 오가며 보니 가판대에 매달린 광고판에

이들의 정체가 아주 작게 적혀있다.

대구에 본당을 두고 있는 신천지의 이 동네 지부다.


그들을 무사히 헤쳐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면

정장을 입은 2인 1조의 여호와 증인 4팀이 있다.

그들은 대로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횡단보도 주변에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단체로 대열을 맞춰 전도하는 게 그들의 방식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신천지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아서 다행이기도 하다.

나름 점잖게 차려입은 그들은 종교 설명 책자를 꽂아둔

책꽂이와 광고판 옆에 조용히 서 있는다.

가식적인 웃음으로 다가와 말을 걸지 않지만

앞을 지나가거나 그들과 눈을 마주치면

어김없이 '생명의 말씀 공부'를 하자고 입을 연다.


여호와 증인의 장애물을 넘고 나면

이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도를 아세요'의 2인조를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생글거리며 다가오는 신천지와도 다르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여호와 증인과도 확연히 다른 아우라다.

화장 안 한 민낯의 질끈 묶은 머리,

허름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메어서

뛰어난 가동력을 실천한다.

싫다고 거절해도 끝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말을 시킨다.


이들까지 무사히 통과하여 지하철 입구로 들어서면

지하철 역 광장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신천지 3인조가 마지막으로 남는다.

다행히 그들의 포교 대상에서 제외다.

지하철 포교 3인조는 이제 막 미성년자를 벗어난

순수하고 착하게 보이는 어린 친구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여자 둘에 남자 한 명, 또는 남자 둘의 여자 한 명의 삼인조는

역할 분담이 정확해 보였다.

두 명은 늘 포교대상을 어디로 가지 못하게 앞뒤를 막아서는 느낌이고

나머지 한 명은 이 들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한 번은 지하철 광장에 이런 삼인조가 너무 많아 신고가 들어왔는지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신천지 여기서 나가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소금비를 맞은 개미들처럼  모두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포교당했던 미래의 피해자들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오늘도 집에서 나와 이들의 포획망을 요지조리 피해 지하철에 올랐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던 이들을 오늘은 유독 눈길이 갔다.

저들은 죽음 앞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

종교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해답과 성찰을 던져 준다.

하지만 어떤 종교도 죽음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만약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말한다면, 이것이 정답이요 라고 외친다면 

그 종교는 사이비일 확률이 매우 높다.

영생, 구원, 환생, 부활 등 육체는 소멸해도 영은 남는다는 주장에서부터

똑같은 인간인데 신이 그 몸 안에 들어와 영원히 산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종교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 법한 주장이다. 

나 같은 인본주의자, 윤리주의자, 개인주의자의 눈에는

특정 집단의 광기 어린 썰로만 여겨진다. 

사이비가 괜한 사이비가 아니겠지....

사후 세계에 대해 추측과 예상을 할 뿐, 

살아 있는 우리는 죽어본 적이 없기에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죽음의 경험을 알려 줄 수 없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은 스토리 텔링 글감으로 매우 우수하다.

적당하게 두려움을 자극하며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 긴장감이 극에 달하면 인물을 변하게 만든다.

또한 억측 같은 주장에 무한한 상상력의 조미료를 뿌려주면

도파민 가득한 오컬트나 판타지 이야기나 나올 수 있다.

준비 중인 스토리가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이라

여러모로 자료를 수집한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이런 소재가 끌리는 건

그만큼 나 자신이 믿음과 종교와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명백한 사실이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또한 아무도 모른다.

삶에 던져진 인간은 신의 소명이 아닌

자신의 자유 의지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나만의 철학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타인과 갈등이 일어날 때는 충분한 대화와 상식선의 합의를 추구한다.

여기에 더하여 서로의 거리를 지키는 무심한 다정함이 마음에 장착되면 좋겠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건 쉽지는 않다.

갈등과 문제는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시지프처럼 매일 바위덩어리를 언덕 위로 밀어 올려도

내일 또 똑같은 바위덩어리를 웃고 울고 화내고 슬퍼하며 또 밀어 올려야 한다.

나에게 주워진 바윗덩어리를 언덕으로 밀어 올리지 못할 때는

나의 나약함을 특정인에게 전가하며 탓하면서

감정을 해소하고픈 어리석고 못난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인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제가 그를 찾아와 회개하라고 권유하지만

그는 사제에게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해도 상관없고 삶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거나 계획하려는 마음이 일도 없는 그가

신과 영생과 천국이라는 앞에서 분노한다.

죽음은 먼저와 나중이 있을 뿐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 동시에 사형 선고를 받고 나오는 거라고 외친다.

신이 과연 이 삶과 죽음에서 무슨 역할을 하길래....


뫼르소처럼 나도 그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교리를 강력하게 전도할 정도의 믿음과 신념이라면

나와 죽음에 대해 논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무거운 감정을 저들에게 해소할 수 있지는 않을까?...

저들이 말하는 영생을 믿는다면 나는  죽음 앞에서 담대해질 수 있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광신의 인간들.

죽은 사람  옆에서 울고 있는 가족 옆에서 하나님 곁으로 편안하게 갔다고

기뻐하라고 떠들어 대는 인간들.

그걸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승화의 정도를 넘은 건 아닐까....?

북저거리는 지하철 속에서 핸드폰만 보는

익명의 무표정한 얼굴들 속에 파묻혀 있지만

내면에는 분노가 올라왔다.  

무작위 한 우연의 사고로 삶을 잃어버리다니...

엉터리 종교, 사이비 믿음, 그릇된 정보,

자아 대신 신을 대입한 노예들...

엄마가 당한 사고에 대한 비난이 이유없이 저들로 향한다. 

신랄하게 따지고 싸우고 싶어 진다, 어리석게도....

 




병원에서 새벽에 걸려온 전화로 내 마음은 안정이 되었지만

마음이 안정되자 '삶과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가 필요해졌다.

이것만이 의미도 없고 이유도 없고 알 수 없는 엄마의 사고와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엄마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은 각자의 의미 부여와 해석으로 이어져 가는 건데

엄마의 사고에 대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알려 들수록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죽음과 다름없었다.

늘 뭔가 알려했고 알고 싶었고 그렇게 삶의 불안을 배움으로 채웠지만

막상 죽음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상황에 내몰리자

어떤 의미도 어떤 해석도 어떤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고 재수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아니 운이 좋아서, 이 정도만이 다행이라서,

마치 진자 운동을 하듯 마음과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든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정말 중요하다.

여기에 따라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

나는 제법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끝을 두려와하는 게 아니라 끝을 마주하는 용기를 통해

삶의 유한함을 꺠닫고, 그 덕분에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얻는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라는 실체가 코 앞으로 다가오니

나의 공부와 생각과 내공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어떻게 바라야 봐야 할까?

엄마의 의지와 선택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사고,

회복과 혼수상태 그리고 다시 찾은 의식과 호흡....


하늘이 내주신 삶의 기한을 천수라고 한다.

나의 기도는 엄마를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천수의 끝이 아닌 것 같기에

제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달라는 것이었다.


엄마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급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머리를 온갖 잡념으로 혹사시키는 것 같다.

생각하면 답이 나올 줄 아는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의 태도뿐인데....

제발 다시 상태가 나빠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나의 분노는 질문으로, 질문은 기도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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