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땡스 투 양희은 선생님
“무슨 일 하세요?”
영화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답하면 10명에 8명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일며 묻는다. “영화사에서 어떤 일을 하세요?” 기획 일을 한다고 답하면 8명에 10명은 이렇게 묻는다. “오, 기획이요? 기획을 어떻게 하세요?”
어느새 3월. 이곳에서 일한 지도 3년 차에 접어들지만, 이 질문에는 여전히 골똘해진다. 글쎄... 내가 기획을 어떻게 하더라?
내 경우에는 가급적 다양한 소스를 접해보려고 한다. 영화, 드라마 같은 영상 콘텐츠뿐만 아니라 뉴스, 책, 음악, 전시회, 공연... 이목구비에 닿는 모든 인풋input에 가능성이 있을 거라 가정하고 물음표를 달고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즐기는 편이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를 보는 데에 ‘노력’해야 할 때는 한숨을 쉬기도 하고, 숨 가쁘게 바뀌는 트렌드와 채널, 콘텐츠의 팽창에는 소화 불량이 걸리기도 한다.
관객이었다면 보지 않았을 것들을 굳이 찾아보며 그 과정에서 운 좋게 무언가 하나라도 꽂히기를 기대한다. 꽂히면 파생된 가지들을 두드려 본다. 새로운지, 시대에 맞는지, 세계관은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대중적인지.
대다수는 시나리오를 읽는다. 대표님이나 주변 지인을 통해 받거나, 작가와 감독들이 건네는 시나리오를 ‘내부 검토’라는 명목으로 읽고 짤막하게라도 피드백을 정리해 회신한다. 좋았던 점은 크게 적고, 아쉬운 점은 보완했으면 하는 내 의견과 함께 작게 덧붙인다. 그렇게 하루에 적어도 한두 편의 시나리오를 읽고, 감상을 쓴다.
의외로 읽히는 시나리오는 잘 없는데, 간혹 읽힌다 싶은 시나리오는 대부분 장편을 한 편 이상 써본 기성 작가들의 것이다. 그럴 때는 좀 아쉽다. 어쩐지 나는 그들과 일하면서 실망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편리하고, 능숙하고 그래서 타성에 젖어있고, 기계적이다. 그런 매끄러운 면이 오히려 우리 사이를 미끄러지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조금 서툴고, 더듬거려도 기회에 갈증을 느끼는 빨간 얼굴에는 무력하게 끌려버린다. 대화하다 보면 이루지 못한 꿈같은 것들이 불끈하기도 하고, 그가 걷는 투박한 길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신인 작가의 글을 읽고 싶어서 오늘도 영화과 졸업영화제나 단편영화제, 비즈 매칭 행사 같은 곳을 찾는다.
모 신인 작가도 그렇게 만났다. 그의 시나리오는 영화감독 조합에서 연례행사처럼 보내주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는데, 잘 읽혔지만 기시감이 드는 아이템이라 아쉽다는 피드백을 전했다. 그렇게 잊고 있던 며칠 후 장문의 메일이 왔다. 자신이 왜 이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으며 그동안 어떻게 디벨롭 시켜왔는지 단숨에 풀어낸, 솔직하면서도 목마른 글이었다. 내가 찾던 빨간 얼굴에 그만 마음이 동해서 시나리오를 다시 읽고 이번에는 더 잘게 쪼갠 피드백과 함께 미팅을 제안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6시간 가까이 수다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며 그의 시나리오를 각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고 무난하지만 한 줄의 컨셉만 명확하다면 상업 영화로 기획해볼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후로 몇 차례 미팅과 연락을 오가며 확신이 든 나는 기획안을 정리해 대표님께 보고 드렸다.
“네가 이걸 하고 싶다고?” 대표님의 첫 반응은 의아함이었다. 그간 내가 선호해왔던, 회사에서 제작해왔던 영화들과는 결이 한참 달랐기 때문이었다. 감사하게도 설득 당해주셨고 곧바로 작가에게 소식을 전했다. 기뻐할 거라 짐작했는데 그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들뜬 내 목소리가 머쓱할 만큼.
이런 류의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 다음날, 계약서 초안을 정리하던 차에 메일을 받았다. 또 장문의 메일이었다. 요는 몇 개월 전 아는 형과 구두로 계약을 한 상황이었는데 진척이 없던 중 외부에 시나리오를 보내봤다가 우리와 연이 닿았다는 것, 어제 내 연락을 받고 아무래도 찜찜해 형에게 말했다가 여러 고심 끝에 결국 남기로 했다는 것, 딱히 계약서는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없을 거라 생각해 그동안 말하지 않았다는, 어설픈 핑계가 정중하게 달려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잠시 정지한 회로를 가까스로 돌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허무했다. 두 달간 내 소중한 시간과 공력을 들인 시나리오 각색 방향만 뺏긴 셈이었다. 그가 회사와 대표님의 이름값으로 더 좋은 계약 조건의 동력으로 삼은 것은 아닐지 죄송했다. 유형의 결과물이 없다면 그 과정은 무형으로 남는 기획일, 두 달간 난 뭘 한 거지?
그럴 때 애써 되뇌는 말이 있다. “그러라 그래~” 가수 양희은 선생님이 주변에서 조언을 구할 때 해주는 말이라고 한다. 내게는 ‘얘야, 이미 지나가버린 일인데 남 신경 쓸 시간에 네 것이나 하라’는 말로 들린다. 남이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그냥 네 갈 길 가면 된다며 등 떠밀어주는 말. 이 말은 그녀의 또 다른 조언인 “그럴 수 있어!”와도 어울린다.
긴 호흡으로 멀리 바라봐야 하는 곳. 나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 번복하길 바란다. 그도, 나도 이리저리 뒤집어 번복을 반복하면서 각자가 맞는 길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내가 두 달간 고심했던 각색 방향으로 영화가 나오게 될까? 그때 말해줘야지. 그래도 메일로 통보한 건 너무했다고. 아, 아니다.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번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