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5, 7이 있으면 뭔가 좋은 느낌~ 그냥 홀수를 좋아하나 봐요!
본가에 가면 대체로 늘어져 있는 편이지만 소소하게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엄마가 틈틈이 메모해둔 구매 리스트를 인터넷으로 대신 주문해주는 일 같은 것. 예전에 한번 호기롭게 도전한 인터넷 쇼핑에서 클릭을 두어 번 더 하는 바람에 쿠션을 여섯 개나 사버린 엄마는 그 후로 직접 주문하길 주저하게 됐다.
내게는 이미 쉽고 간편한 이것이 부모님에게는 어렵고 익숙지 않은 그것일 때, 점점 흐려지는 눈으로 내게 물어오는 일이 잦아질 때마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밀려오곤 하는데, 꾹꾹 눌러 적어둔 리스트를 볼 때가 그렇다.
하고 싶어도 조심스러워 섣불리 하지 못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인터넷 쇼핑 자체를 썩 믿지 못하는 눈치다.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 탓에 단순한 계좌 이체도 인터넷 뱅킹보다는 은행을 찾아 처리하는 분이라 아무리 반짝이는 최저가로 유혹해본들 물건은 꼭 직접 만져보고 사야 한다는 신념의 발품 구매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빠가 어쩐 일인지 인터넷으로 전화기를 사달라고 하셨다. 핸드폰이 아닌 전화기. 요즘 애들은 본 적조차 없어서 통화 아이콘이 수화기 모양인지도 모른다는 그 유물 전화기를 최대한 빨리 사달라고 하신 거다. 내가 “왜?”라고 되물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 아빠는 바로 “우리 집 번호 02-***-5107 살릴 수 있댄다!”라고 덧붙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떠있어서 집 전화번호를 이어가는 것이 아빠에겐 꽤 중요한 일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02-***-5107’은 우리가 3년 전, 재건축으로 과천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24년을 써왔던 집 전화번호다. 핸드폰을 쓰기 전까지는 가장 익숙하게 애용해왔던 번호였기에 우리 가족의 핸드폰 뒷번호는 모두 ‘5107’이고, 나는 여전히 각종 비밀번호로 쓸 만큼 애착이 큰 번호다. 아빠도 비슷했던지 과천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번호부터 물어봐 뒀단다. “그럼 무조건 살려야지!” 바로 전화기를 검색했다.
요즘 집 전화번호를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조차도 누군가에게 집 번호를 물어봤던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초등학교, 아니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친구와 약속이라도 잡으려면 무조건 집을 통해야 했는데 말이다. 뚜뚜- 한참 신호음이 울리다 딸칵 받으면, 최대한 착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저 아무개 친구 이마인데요, 아무개 있어요?” 하면서 친구의 가족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유선으로 연결되어있는 탓에 안방에 있던 엄마가 다른 전화로 내 통화를 엿듣기도 했고, 당시 좋아하던 친구와 통화하다 잠시 ‘작은 일’로 화장실 간 사이에 오빠가 “이마 지금 ‘큰일’ 보러 갔다”고 장난쳐서 운 적도 있었다. 수고로워서 더 기억에 남는 일들.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핸드폰만 바라보는, 심지어는 집 안에서도 카톡을 보내기도 하는 요즘, 집 전화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굳이 외울 필요 없어진 전화번호를 잊어버리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튿날 로켓배송으로 도착한 전화기로 우리 집 ‘5107’을 무사히 살릴 수 있었다. 아쉽게도 예전처럼 울리는 일은 거의 없어서 아빠는 종종 빨간색 수화기를 들어 내게 전화를 거신다. 핸드폰 화면에 ‘우리 집’이 뜨면 통화하는 순간만큼은 정말 ‘집’에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종종 집 전화로 우리 집의 안부를 묻는다.
‘우리 집’은 어느새 나만의 핫라인이 되어버렸지만, 그 핫라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울리는 일이 통 없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고하듯 전화하던 자취 초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든 딸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실없이 웃는다.
가까울수록 다 이해해줄 거라고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두는 버릇을 반성하며 오늘 퇴근길에 내 핫라인을 울려봐야겠다. 올해로 25년을 맞이하는 ‘02-***-5107’에 자주 손때가 묻길 바라면서.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