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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Mar 17. 2021

씨앗을 심자!

봄이네요! 봄이 오면 저는 그냥 기분이 좋아요.

2021년 새해의 결심으로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꼭 두 달을 채웠다.

이전에는 간혹 인상적이었던 날에만 기록한 탓에,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면 뭘 써야 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일상 속에서 기록할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더 재미있는 건 글씨만 봐도 그날의 기분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힘들었거나 기억하기 싫은 날에는 손아귀 힘도 들이기 싫었던 건지 흐릿하니 암호 해독의 수준이고, 선명히 기억하고 싶은 날에는 줄지어 나란히 꾹꾹 눌러 써두었던 것이다.


반면에 여행지에서의 기록은 좋았거나, 싫었거나 늘 단정하다. 여행을 가면 일기와는 별개로 딱 그 여행지에서만 쓸 용도의 작은 수첩을 사서 기록해두는데, 아침이나 저녁에 하루를 다짐하고 회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틈나는 대로 떠오르는 것들을 붙잡아둔다.

코펜하겐 왕립 도서관에서 메모중

여행에서의 하루는 조각조각 틈을 낼 수 있어서 그 틈 사이로 거뜬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모두 새로움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 새로움으로 일상을 환기한다. (아! 여행 가고 싶다!!)


아무튼 여행지에서의 내 글씨가 어찌나 단정했던지 이런 일도 있었다. 2년 전 즈음엔가. 코펜하겐의 한 카페에서 한창 쓰기에 열중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옆에서 보고 있던 남자가 놀랍다는 리액션을 취하며 말했다.

“와우~ 네 핸드라이팅이 엄청나게 작고 빨라서 엄청나게 신기해! 내 이름 좀 적어줄 수 있겠니?”

나는 흔쾌히 “슈어~ 와이 낫?” 하고 바로 마로니에공원의 쌀알 글씨 장인급으로 엄청나게 작고 빠르게 써주었다. ‘스벤덴마크남자사람’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맥주를 사줬던 스벤에게 타투용인지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여행지처럼 일상에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단정한 글씨를 쓰고 싶다. 그저 그런 날에도 단정히 꾹꾹 눌러쓸 수 있는 건, 쓸 수 있는 사람의 자세에 달린 것 같다. 내가 그것을 능히 받아들여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자세 말이다. 그 자세도 요가 동작처럼 매일 단련하면 근육이 붙는 건지 언젠가 몰래 읽어본 아빠의 일기는 내내 단정했다.

몰래 읽어본 아빠의 일기

벌써 몇십 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검은색 모나미 볼펜으로 써 내려간 아빠의 일기 속 글씨는 크기도 모양도 변함없는 필체로 힘주어 쓰여있다. 그 영향인지, 글씨를 보면 그의 생각과 태도가 녹아있을 것 같아 글씨로 그 사람을 지레짐작해보기도 한다.


글씨의 어근은 글의 씨앗이라고 한다. 그의 글씨가 내 마음과 포스터에 심어져 뿌리를 내렸듯 나도 꾹꾹 눌러 쓴 나와 아빠의 일기를 보며 씨앗을 고민한다. 글씨라는 씨앗에 움튼 생각이 글이라는 열매로 결실을 보는 것처럼 나란히 줄지어 심을 나의 씨앗은 무엇일지, 나와 내 주변에 어떤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 궁리해본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마침 3월 1일, 아침부터 촉촉이 봄비가 내려 봄의 시작을 알린다. 이번 봄에는 씨앗을 심어볼 셈이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3월에는 뭐라도 나오겠지!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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