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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Feb 24. 2021

필름 시대의 사랑

연사도 좋지만, 셔터를 아껴 누르던 시절이 그리워요.

으~ 신경 쓰인다.

며칠 전부터 핸드폰에 떠 있는 새빨간 알림 말이다. 바꾼 지 이제 석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2GB 남짓한 용량으로 끙끙 부단히 애쓰는 소리가 들린다. 총 128GB 중 가장 많은 지분, 96.08GB를 차지하고 있는 건 사진이다. 삭제할 수 있는 사진을 검토해달라며 소리치는 알림을 오늘도 애써 무시한다. 미안하지만 몇 번을 검토해봐도 삭제하는 건 어려워. 아 이럴 거면 왜 256GB로 사지 않았을까. 내겐 실시간으로 찍어야 할 강아지도 있는데... 끙끙.


그렇다. 나는 ‘삭제 어려워 병’ 중증이다. 이 병은 SNS 컷 한번 잘 찍어 기사 한 방을 노리던 엔터테인먼트 홍보팀의 직업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보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촬영이었다. 정확히는 SNS 공식 계정에 올릴 사진과 영상 촬영. 따로 촬영팀이 붙기도 하지만, 현장 가까이에서 기삿감이 될만한 찰나를 눈치껏 잘 포착해 활용하는 일은 오직 홍보팀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가령, 상사들이 좋아했던 내 역량은 남친짤(*일상에서 남자친구를 찍은 듯 자연스럽고 훈훈하게 찍힌 사진. 나는 무려 중년 아저씨 배우에게도 남친짤을 뽑아냈다! 아무도 내가 찍은 줄은 모르겠지만! 후후)이었는데 나는 주로 시사회나 화보 촬영, 인터뷰가 있는 날, 말하자면 최대한의 꾸밈 상태에 놓인 배우를 어르고 구슬려 뽑아내곤 했다. 반응이 꽤 괜찮았던 사진은 나중에 또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컷들을 일단 보관해두었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있는 게 아닐까?


음... 그러기엔 퇴사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군. 정정한다. 그냥 내 성향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진 한 장에도 쉽게 감상에 젖는, 경중을 따질 수 없어 일단 보관해두고 보는 내 성향.


이런 성향은 아무래도 아빠를 닮았다. 일기와 사진으로 일상을 기록하고, 신생아 시절 내 발톱과 배꼽까지 보관해둔 아빠.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 속에서도 아빠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다.

어릴 적 주말에도 출근할 만큼 바빴던 아빠는 가끔 짬이 나면 집 앞 화단 앞에서라도 오빠와 나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셨다.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자고 있을 때 퇴근하던 아빠가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해 한 컷, 한 컷 신중을 기해 찍어주는 그 모습이 좋아서 나는 아빠가 사진만 찍자고 하면 자다가도, 놀다가도 뛰쳐나갔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부지런히 남겨주신 사랑

그렇게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주신 덕에 내 이름이 붙여진 여섯 개의 앨범이 남았다. 아빠는 사진 옆에 간단히 메모도 해두었는데, 기억력이 약한 나는 이 메모로 유년 시절을 추억하기도 한다.

분명 얼굴을 잔뜩 구기며 울고 있는데도 ‘즐거운 한때’라고 쓰여있거나, 아빠가 없는 가족사진에도 감상이 쓰여있거나 하면, 과연 맞는 건지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뭐, 아빠의 기억으로 조금 미화되어도 손해 볼 건 없다 싶다. 아빠는 부재했던 시간을 사진과 메모로 메우고 싶었던 걸까.


아빠의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난 후 내게 남아 있는 앨범은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스티커 사진에 붙여진 채 잊어버렸고, 대학교 시절은 싸이월드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고작 폴더 몇 개에 남아있는 파일들과 앨범에 미처 끼워지지 못한 사진들, 그리고 핸드폰에 있는 96.08GB가 전부다. 이 또한 소중한 추억들인데 어쩐지 한 번의 터치로 당장 휘발되어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어느덧 지금의 나는 아빠가 처음 아들과 딸의 앨범을 만들었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아빠처럼 나도 사진으로 메모를 한다. 보고 싶은 것들을 캡처해두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포착해둔다.

한라산 등반길. 신발끈을 묶어주는 엄마와 우비로 차양 만드는 아빠

그리고 부모님을 찍어둔다. 여행을 가거나 산책할 ,  먹을  틈틈이 사진과 영상을 찍어둔다. 세월을 담는 해상도는 눈보다 카메라가  높은 건지 가끔 들여다보는 화면  부모님의 흰머리와 주름 더 깊어져 있다. 지금 기록해두는 사진이 나중을 대비하는 용도일 거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면 슬퍼진다. 그럴 때 화면에서 눈을 떼고 하나하나 담아 넣어본다.

이번 구정 연휴에는 아빠가 쓰던 펜탁스 필름 카메라를 받았다. 봄이 오면 아빠가 나를 봐왔던 네모난 프레임 속에 아빠를 넣어 천천히 셔터를 꾹 눌러야지. 디지털 시대의 사랑은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니까.


아, 그전에 아이클라우드(*Apple 기기에 있는 사진, 파일, 메모 등을 보관하는 프로그램. 최대 92.57GB를 절약할 수 있다며 지금도 나를 꼬시고 있다.)부터 업그레이드해야겠다.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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