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름 앞에 제작 크레딧을 달고 싶어요
“[단독] 배우 아무개, 영화 ‘아무거나’ 출연 확정!”
이런 류의 기사를 본 적 있으신지. 포털사이트 연예 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기사에 그냥저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홍보팀을 지나온 나로서는 저기 붙은 [단독] 타이틀에서 무례함을 읽는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대개는 무단으로 기사화했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다.
‘단독’ 타이틀은 특종을 따낸 기자가 기사 앞에 붙여 내보내는 단신 기사로, 대중의 클릭 수로 수익을 내는 기자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치를 입증하는 일종의 성과급인 셈이다. 대다수가 아는 정보일지라도 ‘누가 먼저 내보내냐’하는 속도가 생명인 탓에 다들 ‘단독’ 꼭지 하나 붙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고,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확인 절차도 생략한 채 무단으로 내보내는 일도 허다하다. 아니 당사자에게 말도 안 하고 내보내다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많이들 그러신다.
어찌 보면 글자 하나, 클릭 한 번으로 쉽게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일말의 책임감도 없이 손가락들을 휘두르는 탓에, 배우 매니지먼트사에서 홍보팀으로 있던 삼 년간 나는 도통 그들에게 정 붙이기가 힘들었다. 오늘 앞에서 하하 호호 웃다가도 다음 날 내 등 뒤에 ‘단독’을 꽂아 넣을 때는 나 혼자 사람으로 대한 건가 싶어 숱하게 허무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지금은 친구가 된 기자도 있지만. 어쨌거나 더는 사람에게 실망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결국 기자와 일하기 싫어서 퇴사했다.
그리고 영화사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 이곳에선 그놈의 단독 따위에 시달릴 일 없겠지 싶었는데, 윽! 과소평가했다. 입사 때부터 기획에 참여한 내 첫 영화가 ‘단독’ 타이틀로 ‘무단’ 공개되어 버린 것이다.
어이없다. 특히 캐스팅은 세부적인 계약 조건들이 오가는 시기에, 말하자면 아직 계약서 도장도 찍지 않았는데 말이다.
난감하다. 이렇게 이른 시점에 기사화가 될 경우, 계약 자체가 무산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애매하다. 이럴 때는 ‘긍정 검토 중’ 밖에는 달리 내놓을 수 있는 답도 없다. 뻔한 답이지만 확정은 거짓이고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것은 사실이니까.
허무하다. 영화의 줄거리까지 기자 마음대로 주물러 내보냈던 것이다.
심지어는 최근에 수정한 버전도 아닌 예전의 시나리오, 추정컨대 5고 즈음의 내용이었다. 대체로 영화 시나리오는 촬영 중에도, 아니 편집이 끝날 때까지도 수정되는 일이 잦기 때문에 항시 보안을 최우선으로, 각별히 외부 유출에 신경 써왔는데 대체 어떻게?
홍보사를 통해 기자에게 캐물어 봤지만 “죄송하지만 출처는 보호”해달라고 했단다. 헐~ 뭐라구요? 죄송하지도 않으면서 죄송을 방패 삼아 실컷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무례한 권리를 세우는 부류. 정말 싫다. 에잇, 코 옆에 왕 큰 오서방 여드름 생기고 문턱에 새끼발가락 꽝 찧고 종이에 손가락이나 콱 베여라!
여러 탐문 수사 끝에 출처는 모 매니지먼트사의 매니저로 추정됐다. 공교롭게도 캐스팅을 위해 몇몇 매니지먼트사들에 시나리오를 보냈던 시점이라, 아마도 그 기자와 친분이 있던 어느 매니저가 생각 없이 흘려 보냈으리라 이마저도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 유출로 곤혹스러웠지만, 다행히 온라인상의 반응은 좋았고 예비 관객들의 응원은 모두의 동력이 되어 빠르게 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부득이 외부에 시나리오를 보내야 할 때 파일로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대신 외부 공유용 원본을 만들어, 수신인을 명기한 워터마크와 별도의 표식을 넣은 시나리오를 출력해 인편으로 전달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돌려받는 방법을 썼다.
가까운 미래가 배경인, 나름대로 SF영화인데 실제 업무 방식은 지극히 구식이라며 웃기도 했다. 같이 웃을 수 있어서, 이제는 웃으며 넘겨버릴 수 있는 힘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편의 영화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현장의 제작 스태프들과 제작사, 배급사, 투자사, 홍보사, 배우들, 그들의 매니지먼트사까지. 모두가 이 영화 한 편을 위해, 크레딧에 자랑스럽게 기록되기 위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밤낮으로 고심하며 달려간다. 모두가 달려온 결실임을 알고 있는 나는 엔딩 크레딧을 볼 때마다 새삼 놀라워 마지막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부디! 제발! 모두의 결실이 한 사람의 섣부른 판단으로 수많은 대중에게 무단 노출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누구나 손꼽아 기다리던 첫 소개팅 자리에 맨 얼굴과 잠옷 차림으로 끌려 나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나? 전날 밤에 모처럼 알로에 팩도 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옷도 골라놓고 때가 되었을 때 짜잔~ 우리 영화 참 이쁘죠? 하고 자발적으로 등장하고 싶은 것이다.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버린 첫 소개팅의 허무는 누구의 탓이고 누구의 몫인지. 가볍게 손가락을 놀려 클릭하기 전에 딱 우리만큼만 고심해주었으면, 하고 오늘도 바라본다.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