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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Mar 29. 2021

이사 단상

그날 차 안에서 나눴던 대화는 사실 눈물 버튼. 콕콕.

연초나 연말이 되면 재미 삼아 사주로 그 해를 점쳐보곤 하는데 때마다 꼭 듣는 말이 있다.

“아이고~ 바빠~ 일복도 참 많다. 올해 이동수가 있네?” 대체 이 동네 일은 내가 다하는 건지. 꾸준히 일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한다지만 ‘바쁘고 일복 많다’는 신세는 느긋한 팔자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한숨만 안겨줄 뿐이다. 가만, 바쁘고 일복이 많기 때문에 느긋한 삶을 지향하게 된 걸까?

어쨌거나 해마다 바쁘고 일복 많은 나는 이동에도 참 부지런해 왔다. 매번 3년을 넘기지 못했던 경력은 네 번째 회사에 머물러 있지만, 이곳에서도 이제 막 3년차, 또 어찌 될는지 장담할 순 없다. 장담하고 싶지 않다. 가급적 지금 머물러있는 곳에서 찾고 싶지만, 다른 곳에 끌리는 무언가가 생기면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반경을 넓혀가고 싶다.


이런 강력한 이동 의지가 회사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지. 희한하게도 내가 옮긴 회사는 꼭 한 번은 이사했다. 첫 회사는 압구정 안에서만 두 번을 옮겼고, 두 번째 회사는 영등포에서 역삼동으로, 세 번째 회사는 역삼동에서 논현동으로, 지금의 회사는 연희동에서 이태원으로, 그리고 다음 주면 또 압구정으로 이사를 한다.

첫 회사의 (대체로 암울했던) 추억이 묻은 압구정으로 돌아간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전보다 출퇴근이 편해져 일단은 웃고 싶다. 이제 다섯 손가락 안으로 다가온 손 없는 날을 맞이하며 책상 서랍 칸칸이 묵혔던 짐을 정리한다. 몸을 움직이니 머리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리저리 움직인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이사는 태어나 초등 3학년까지 살았던 광명을 떠나 과천으로 왔던 날이다.

공무원 아빠의 빠듯한 월급을 알 리 없던 9살의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광명보다 작아진 거실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고 한다. 그 후로 2년 간격으로 712동에서 730동, 그리고 724동으로 옮겨가며 점차 넓혀간 거실의 이유는 그날의 울음 때문이었다고, 언젠가 아빠의 회상으로 더듬는다. 철부지 어린 딸의 눈물이 부모님의 가슴에는 얼마나 큰 멍이었을지 가늠만 할 뿐이다. 과천에서만 내리 20여 년을 살다 재건축으로 잠시 인덕원에 살던 때에도 도무지 정을 붙이지 못하고 나는 늘 과천 724동을 그리워했다. 인덕원 402동에게 미안할 만큼.


다시 과천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 2년쯤 지났을 때였나. 나는 돌연 독립을 선언했다. 버킷리스트로 마냥 미뤄뒀던 독립의 꿈은 같이 살아보자는 친구의 말에 속도가 붙었고 어느덧 이사하는 날이었다.

2019년 5월 18일.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던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선하다. 독립 선언에 금세 벌게진 눈에 눈물이 고였던 엄마는 아침부터 내 눈을 피했다. 옷 몇 가지랑 좌식 의자만 들고 가서 임시로 살아보다 언제든 돌아오라며 이삿짐 용달차를 부르는 것도 반대하는 바람에, 내 허술한 짐들은 아빠와 오빠 차에 실려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했다.


집 떠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싱숭생숭 더 허술해진 나 역시 아빠 차 조수석에서 실려 가구를 고르던 중이었다. 토요일 오후, 오가는 차량으로 꽉 막혀있는 시청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하던 아빠가 넌지시 물었다. “이마야... 혹시 아빠가 그 말 해서 나가는 거니?”

잠겨있는 목소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물음이었음을 알았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 기억나지 않았던 나는 “응? 무슨 말?” 하고 되물었고 “그 왜 작년 추석에 떡볶이 먹다가...” 하자마자 매콤했던 기억이 스쳤다. 맞다! 떡볶이!


때는 2018년 추석 연휴, 나와 오빠는 여느 휴일처럼 TV를 보며 깔깔대고 있었다. 우리들의 입이 쉬는 틈을 보지 못하는 엄마는 때마침 떡볶이를 만들어주셨고, 때마침 아빠는 안방에서 옛 직장 동료들에게 안부 전화를 받고 계셨다. 예상컨대 수화기 너머로 자녀들의 결혼이니 손주니, 자랑거리를 한껏 들으셨을 테고, 누구를 향한 것일지도 모를 은근한 불이 타올랐을 거다. 그렇게 열불이 오른 상황에서 방 문을 열자마자 본 풍경은 이미 손주 두 명은 거뜬히 봤어도 모자랄 과년한 아들과 딸이 엄마가 해준 떡볶이를 먹으며 태연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을 거다.

첫 타깃은 5년째 연애 중인 오빠. “다음 설 연휴에 혜진이 얼굴 좀 보자” 한창 TV에 젖어 있던 우리는 아빠의 온도를 미처 느끼지 못했고, 다음으로 미루는 오빠와 실랑이가 길어지자 일단락하고 싶은 마음에 “아유 냅둬~ 알아서 하겠지~”하고 느긋하게 던진 내 한마디는 즉시 불쏘시개가 되었다.


화력은 거세졌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빠는 빨간 얼굴로 속사포 한풀이를 쏟아 내셨다. 요지는, 알아서 한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지금 뭐 하고 있냐, 너는 32살에 결혼해 나가 산다면서 지금 뭐 하고 있냐, 남들은~ 어쩌구 다들 아시죠... 이하 생략.


결국 ‘지금 뭐 하고 있냐’는 것이 포인트였다. 당시에 시나리오를 공부하겠다며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나왔던, 멀쩡히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던 나는 그 ‘지금 뭐 하고 있냐’에 직격타를 맞아버렸다. 무엇보다 엄마와는 달리, 지금껏 내게 한 번도 결혼을 재촉한 적 없던 아빠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 제일 서운했다. 아니 뭐 결혼은 혼자 하냐구요... 아빠가 던진 불똥에 서러움이 밀려 나온 나는 그대로 씹던 떡볶이를 탁! 내려놓고 문 쾅! 을 시전했던 시트콤스러운 기억.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예삿일이다.


정작 당사자는 잊고 지냈는데 아빠는 내내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그럴 리가 있냐며 손사래 치자 아빠는 “그 말 해서 나가는 거면 안 가도 돼...”라고 부언한다. 분명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아빠의 오른편 얼굴을 보다가 또 울어버릴 것만 같아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봄과 여름 사이, 내 방 창가 새하얀 사과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집으로 그렇게 처음 부모님을 떠나왔다.


아빠의 지난 일기들을 읽어보고 있는 요즘. 그날의 아빠가 궁금해져 미리 펼쳐보았다. 울보 딸내미의 눈물을 곧잘 기억하던 아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딸이 둥지를 떠난 

아빠 일기 속 캘린더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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