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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Apr 12. 2021

나만 좋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나만 좋은 건가요?

매일 밤, 나는 암샤를 한다.

갈아입을 옷가지와 뽀송한 수건을 꺼내고, 블루투스 스피커도 챙겨 들어간다. 수도꼭지를 좌측으로 비틀어 잠시 온수를 기다린다. 물이 충분히 데워지는 틈을 타 창문을 1/3 즈음 열고 스피커의 볼륨을 높인다. 냉온수를 섬세하게 조절해 만족스러운 뜨끈함이 되면 바로 목 뒤부터 데워 온몸에 퍼지는 온기로 그날을 씻어낸다.

앗. 마침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이런. 흥얼대다 그만 샤워볼을 놓쳐버렸다. 당황은 잠시, 익숙한 발놀림으로 바닥을 더듬거린다. 왜 손이 아니라 발이냐고? 경험상 무언가를 찾을 때 불빛에는 손이 빠른데 달빛에는 발이 수월하더라. 무슨 말이냐고? 아 참, 나는 욕실 불을 켜지 않고 깜깜한 채로 샤워를 하곤 한다.


이른바 ‘암샤(암흑 샤워) 타임’이라고 명명한 이 시간은 내가 어둠을 무서움이 아닌, 편안함과 자유로움으로 느끼는 유일한 시간이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어둠은 아니고, 달빛이나 건너편 건물에서 비추는 어스름한 빛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은은한 빛 아래 밀실에서의 시간이니, 은밀한 시간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우후후~ 여하튼 나의 이 은밀한 암샤는 그날의 장면이나 생각, 대화를 흑막 위에 띄워두고 그 쓸모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시간이다.


암샤는 창문과 함께하면 더 좋다. 오래된 집일수록 욕실에 창문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20여 년을 살았던 주공아파트 본가에도 작은 창문이 있었다. 5층짜리 아파트의 5층 집이었던 우리 집은 주변 단지보다 살짝 높은 지대에 있어 욕실 창문을 열면 관악산이 정면으로 보였다. 해 질 녘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불을 켜지 않은 채 반신욕을 하며 관악산을 등지고 보랏빛으로 타는 노을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한겨울 노천탕이라 상상하며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데우고 있노라면, 귀신 나오겠다며 불을 켜려는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지만... 지금도 종종 떠올려보는 낭만적인 순간이다.

나의 낭만~ 보라보라해~

신축 아파트로 이사한 본가의 욕실 창문은 모두 환풍기로 바뀌었지만, 지금 친구와 살고 있는 집에는 다행히 나만의 낭만이 남아있다. 친구는 나의 암샤 찬양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목욕을 좋아하는 내가 길고 긴 암샤를 할 동안 한 번도 불을 켜거나 재촉하지 않아 준다. 진짜 귀신이 나올지도 모를 노랫소리까지 참아준다. 이해심 많은 동거인을 만나 다행이다.


암샤처럼, 나는 어딘가 꽂히는 포인트가 좀 특이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누군가와 같이 영화를 볼 때면 더더욱. 극장을 나오며 흥분해서 내뱉는 장면이나 대사에 ‘그런 게 있었냐’며 동조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럴 때면 좀 외로워진다. 아마도 영화를 분절해서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직업병 탓이리라. 남들은 힘주어 기억하지 않을 씬들에 그만 꽂혀버려 혼자 씩씩 흥분을 삭이는 나란 쓸쓸한 관객.


주변의 공감을 얻지 못해 홀로 고독해지는 때는 또 있다. 바로 사람에 꽂히는 순간이다. 연애를 쉽게 잘 시작하는 편은 아니라서, 연애 중이라고 하면 친구들은 ‘어떤 사람인지’보다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더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나만의 특이점일지, 혹 궁금해할 분들을 위해 지난 연애의 시작점을 예로 들어보겠다.


때는 초여름의 주말 점심, 배경은 어느 일식집. 두 번째 만난 우리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는 처음 소개팅으로 만났는데, 30대에 이렇게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하다간 그대로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다는 친구의 협박과 샌님 스타일이라는 말에 혹해 이뤄진 만남이었다.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는 성실하게 출퇴근하며 사는 현대사회의 샌님이었고, 당시의 나는 그런 그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에 물음표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솔직히 빨리 밥 먹고 집에 가고픈 생각뿐이었던 나는 눈앞에 놓인 메밀 소바를 있는 힘껏 후루룩하며 맞은편 크림 우동을 기웃대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왼쪽 눈두덩이가 좀 달라 보였다. 처음엔 모기 물렸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웬걸 면발이 줄어들수록 왼쪽 눈이 점점 부풀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내 그의 왼쪽 시야에 80% 정도로 보이던 내가 말했다. “저기.. 지금 왼쪽 눈이 너무 커졌는데요...”

내내 평온하던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요동치며 허둥지둥 약국부터 찾았다. 근처 약국에서 약을 타오는 길에 그는 이 모든 소동이 부끄러운 듯 어쩐지 아까부터 왼쪽 눈이 무거웠다며, 실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는데 크림 우동에 들어간 날치알 때문인 것 같다며, 식사를 망쳐 미안하다고, 이제는 30% 즈음 보이는 왼쪽 눈동자가 고백했다.

되려 그 모습이 바보 같고 귀엽게 느껴져 전혀 관심 없던 그에게 꽂혔다는, 내가 이상한 건가?


이를테면 웃어야만 보이는 턱 보조개의 존재를 무심히 짚어준 사람에게 꽂혀 버리거나, 바짝 깎은 단정한 손톱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검은 머리 파뿌리 할아버지가 됐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거나 하는 것... 나만 좋은 건가요?


매번 시나리오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새기는 말이 있다. 세상에 ‘평범한’ 인물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 어떤 주인공이 어떻게 변화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는 있어도 세상에 하나같이 똑같은 인물은 없다는 것. 아무리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한들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입고, 먹고, 살아간다는 것. 그 방식을 서술하면 그것이 곧 개성이고, 캐릭터고,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남들이 되어 보지도, 살아 보지도 못한 유일무이한 캐릭터고, 우리는 각자 영화의 주인공인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방식대로 써 내려가고 있는 내 영화가 나는 꽤 마음에 든다. 설령 나만 좋을 수도 있겠지만, 매일 밤마다 욕실에서 찍는 흑백영화도.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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