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달리며 종종 남겨둔 기록
*02-08-화
보건소에서 생애 첫 pcr검사 결과를 받았다.
내내 가슴 졸이게 만들었던 '음성'이라는 단어 하나에 안도와 허무가 밀려온다. 어제 하루 동안 혹시나 양성이라면,이라는 가정에 붙은 걱정들 중 가장 큰 비중은 두유의 응아 산책이었다니 어쨌거나 다행이다. 집에서 넉넉 10분은 걸어야 나오는 홍제천에서 처음 달려보며 머릿속에 까맣게 붙어있던 생각들을 털어냈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는 축축해진 마스크를 벗고 참았던 하루치 숨도 토해냈다.
오랜만이라 길게 달리지는 못해도 꾸준히 걷기는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뿐해진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길, 2월의 목표는 일상을 달리고 쓰면서 환기하자고 생각했다. 이제 봄이기도 하니까.
*02-10-목
운동을 마치고 바로 달리러 나왔다. 늦은 시간이지만 기분 좋게 오른 열 덕에 얼굴에 와닿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져 달리기에 딱이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런데이 어플을 켜봤는데 놀랍게도 4년 전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1년간 이직을 유예하고 내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탐색해 보던 시절. 패기 넘치게 퇴사했지만 30대 백수의 자기계발에는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달렸다.
머리가 엉킬 때 정돈하고 싶어 달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생각이 없어진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트레이너의 활기찬 음성에 맞춰 달리다 보면 무중력 상태라고 해야 하나? 나 홀로 공중에 붕떠서 호흡, 보폭, 지압점, 손의 리듬감.. 일상에선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일시에 밀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내딛는 움직임 하나하나 세심히 집중하다 보면 내 몸과 일상을 더 세심히 다룰 수 있게 될 것 같은 믿음.
그때 그 감정을 오늘 다시 느낄 수 있어서 4년간 열심히 달려온 나에게 고마운 밤이다.
*02-13-일
어제부터 미세먼지옥인지라 운동간 김에 트레드밀 위에서 걷고 달렸다.
나만 그런 건지 이상하게 트레크밀에서는 달리려고만 하면 다리가 뚝딱뚝딱 어색해진다. 아무래도 정해진 속도에 맞춰 펴고 굽히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밀려 넘어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 때문인 듯. 잔뜩 긴장한 채 달렸더니 어깨마저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어 결국 20분 만에 내려와 땅을 좀 걷자 싶어 동네 한 바퀴를 삥- 돌았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동네 꼬마들이 과자 한 봉지를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스크 내리고 과자 한 입 넣고 마스크 올리고 우물거리고 내리고 올리고 무한 반복. 밖에서 과자 한 입 먹기가 이렇게 분주했던 건가. 귀여우면서도 참으로 애틋한 풍경이다. 오미크론이니 미세먼지니 들이 내쉬는 숨 하나 장담하기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나와 주변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가 간다.
*02-15-화
쌀쌀해진 공기 탓에 트레드밀을 걸었다. 걸으며 메타버스를 생각한다.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이놈의 가상세계에 신경이 쏠려있는 이유는 이사님이 대뜸 게더타운에 회사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익숙해지면 사무실을 없애자는 의견까지.! 우리 회사가 드디어 구글이 되는 건가? 복지는 아닌데 시스템만 너무 혁신적이라 도무지 어찌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다가 아바타 팀원들과 일하기는 아무래도 싫단 생각에 잘 거절하기 위해 공부하기로 했다.
아직은 효율보다는 온기를 느끼며 일하고 싶고 부대끼며 살고 싶다. 인간은 가상세계 속 아바타가 되고 싶어하고 가상세계 아바타는 갈수록 인간과 비슷해지다가 결국에는 두 세계가 전복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이런저런 망상 속에 삐걱거리며 걷고 뛰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트루먼쇼의 달 조명처럼 둥글고 밝은 정원대보름 달을 바라봤다. 두 손 모아 가상 사무실을 결사반대하며.. 허허 (결국 없던 일이 되긴 했다 허허)
*02-17-목
간만에 야근 후 귀갓길. 바람이 매서워 쉴까 1초 고민하다가 오늘은 좀 걸어야 할 것 같아 센터로 갔다.
걸으며 오늘을 리와인드해본다. 근 한 달 만의 피드백 회의. 비대면도 고려해 봤지만 줌으로는 아무래도 서로의 비언어적 표현까진 잡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만약 시나리오를 잘 봤다면 몇 가지 언어만으로도 충분했을 테지만.. 상대의 노력을 지켜봐온 거절은 늘 어렵다. 눈짓 손짓 발짓까지 써가며 ‘죄송하지만 재미없어요'를 애써 전하자 작가는 애석함을 감추며 이유를 찾고 싶어 했다.
음.. 무엇보다 가짜 같았다. 서로가 처음 사랑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냥 그렇게 설정해둔 가짜 같아서 인물도 감정도 모두 가짜처럼 느껴져 두 사람의 서사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진다고? 이렇게? 갑자기? 피상적인 연애를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아니 그럼 진짜는 뭔데? 물음표들이 꼬리를 물고 물어 똬리를 튼다.
이를테면 둘이 만나. 서로의 외모에 일단 호감을 가져. 술도 한 잔하면서 대화를 해. 뭐 이 정도면 대충 통하는 것 같아. 어느덧 시간이 늦어 집 방향으로 걷자고 해. 기분 좋은 취기에 나란히 발맞춰 걷다가 나른한 분위기가 잡혀. 손을 잡아. 키스를 하려고 해. 갑자기 누군가 속이 울렁거린다고 해. 오바이트를 시작해. 너무 놀란 상대는 뒷걸음질 도망가 버리는데.. 그때 등장한 주인공이 이 밤중에 혼자 토하고 있냐고 혀를 끌끌 등 두드려주면서.!
나는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약점을 보이고, 들키고, 밝혀야 진짜가 시작되는 것 같다고, 집에 와 그때는 미처 전하지 못한 코멘트를 덧붙여 회신을 보냈다. 뭐든 더 나아지길 바란다.
*02-20-일
이렇게 한낮에 달리러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일부러 점심시간대 맞춰 홍제천에 나왔더니 오가는 이들이 없어서 마스크도 내렸다. 40분 천천히 달리기로 맞춰두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어느 할머님이 걸어오고 계셨다. 단출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나처럼 모처럼의 볕을 쬐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롱패딩을 벗어 입구에 대충 접어두고 요란스레 뛸 준비를 했더니 할머님도 내 쪽을 보신듯했다.
드디어 달리기 시작. 짧은 거리인지라 왕복해 걷고 뛰며 할머님과 몇 번을 마주쳤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해야 하니 처음엔 뭔가 어색했는데 서너 번즈음 지나 패턴이 읽히자 언제쯤 할머니가 저 코너를 돌아오실까 기대도 됐다. 30분쯤 지났을까 아까 지나친 할머님이 보이지 않으셨다. 집으로 가신 건가, 내심 서운해하고 있던 차에 할머님이 입구에 앉아 쉬고 계신 게 보였다. 마구잡이로 벗어둔 내 롱패딩 옆에 나란히. 그 모습을 한두 번 지나치며 40분을 다 채우고 가뿐한 마음으로 입구로 갔을 때 할머님은 안 계시고 대신 가지런히 접힌 내 롱패딩만 있었다. 뭐지 혹쉬 달리기 요정..? 일면식도 없던 할머님과 나, 단둘이서만 공유한 40분의 달리기. 언젠가 또 마주칠 수 있을까? 오늘의 달리기는 덕분에 할 수 있었다고 감사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두유랑 저녁 산책을 나왔더니 어느새 해가 제법 길어졌다. 이제 할머님의 광합성 산책도 길어지겠다 싶었다.
*02-24-목
생각이 너무 많다. 여러 생각들로 엉켜있을 때 서둘러 잠부터 청한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예 그 자체를 잊었거나 희미해지는 것이 보통. 그런 생각들은 쓸모없는 걱정이거나 이미 엎질러진 후회와 분노로 만들어진 망상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뒤척여봐도 잠들 수 없거나 자고 나서도 선명하다면 큰일. 이건 머리만 대면 5분 안에 잠드는 잠순이의 대소사분간법.
피곤했지만 더 피곤해지려고 3km만 뛰고 걷다 왔다. 충분히 피곤한데도 되려 말똥해져 여전히 잠은 오질 않는다. 하릴없이 기사를 스크롤하다 기상 예보를 보니 차츰 추위가 풀린다고 한다. 내일은 롱패딩 세탁을 맡길 셈이다. 내일의 나는 좀 더 가볍고 뽀송해지겠지.
*02-27-일
날이 꽤 풀렸다. 두유랑 산책하기 딱 좋았던 오후. 우리가 종종 같이 뛰곤 하는 공터에서 서로의 뒤꽁무니를 쫓고 쫓는 이 소소한 시간 덕에 또 월요일 다시 일주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드디어 3월이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