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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MAMBA Mar 19. 2023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아

꽃에 물 주기

비상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과 약국에 들른 길


꿈에 그리던 출국 날 아침은 찬란했다. 평소라면 이미 출근해서 이메일 확인을 끝냈을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사실 시간을 확인하고 살짝 흠칫했다. 지각한 줄 알고.) 짐은 전날 저녁 퇴근 후 새벽까지 챙겨두었기에 아침에 사용한 화장품이나 머리 에센스 등만 추가로 넣으면 되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거의 일주일이나 물을 먹지 못하고 엄마만 기다리고 있을 식물들에게 물을 주는 것.


한동네에 살던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땐 그저 언제 와서 물을 좀 주라고 부탁을 하면 됐지만,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뒤로는 항상 식물들이 물을 매일 마시지 않아도 되는 겨울에만 여행을 떠나는 게 엄마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제까지고 우리가 이 수많은 식물들과 삶을 함께 하는 동안에는 계속 이렇겠구나 생각하면서, 할머니에게 뒤를 맡기고 제주로 떠났던 2017년의 겨울을 상기하며 하늘의 별이 된 할머니의 생각을 한 방울 떨어트려 본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또 한 번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이다.


마당의 수도꼭지가 얼지 않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새시 안에 넣어두었던 호스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야속한 수도꼭지는 응답이 없었다. 집 안쪽에 있는 수도꼭지에 연결해 물 주기를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호스끼리 아귀가 잘 맞지 않아서 물이 쫄쫄 새거나 수압 때문에 갑자기 펑하고 연결호스가 빠지는 경우가 있어 물 주는 내내 그 자리에 한 사람이 지켜보고(=잡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마당의 것보다 좀 더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나의 간절한 바람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한숨을 쉬며 호스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와 가게 쪽 주방 수도꼭지에 연결했다. 제발 갑자기 연결이 풀려 물벼락을 맞는 일만 없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며 호스를 연결하고 물을 틀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면 물이라도 듬뿍 주고 떠날 수 있겠지, 돌돌 말려있는 호스를 풀고 풀어 마당까지 펼쳤다. ‘자, 지금 물 튼다! 이것만 하면 공항으로 갈 수 있어.’ 비행기는 5시였지만, 나는 이미 오늘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아니 어제 퇴근하는 순간부터, 아니 이번 주가 시작되던 월요일부터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일로 여행에 차질을 빚을 수는 없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은 비단 옷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리라. 정원의 식물들에게 물을 듬뿍 주는 일은 이 모든 여행의 첫 단추였다.


“물이 안 나와!”


아뿔싸. 출국 하루 이틀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파는 정원의 수도꼭지만 얼린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정원에서 열일했던 호스 안에 남아있던 물이 얼어 호스 전체가 얼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많은 식물들에게 어떻게 물을 준담. 호스 안의 물이 얼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왠지 호스를 다시 감는 것이 더 어렵고 힘이 드는 것만 같았다. 물조리개는 없고, 분무기로 뿌리자니 물 주다가 비행기를 놓칠 것만 같았다. 엄마, 빨리 나가서 물 조리개 사와! 다급한 마음으로 차키를 안겨주고 대문 밖으로 떠밀었다.


뭐가 없을까 집안을 두리번대다가 영양제를 줄 때 쓰는 분사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다. 그래도 분무기보단 낫겠지, 8리터 통에 물을 잔뜩 넣고 공기압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간사하게 얇은 물줄기가 새어 나왔다. 라운지도 들어가고, 면세점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뭐를 포기해야 하나 계산하며 얇은 물줄기를 쏘아대었다. 철물점이 닫았다며 빈손으로 돌아온 엄마도 바스켓으로 물을 날라 바가지로 물을 주기 시작하였다. 강아지나 고양이만큼도 인간과 소통할 수 없는 식물이라지만, 누가 자기 물 주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서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시름시름 앓는다는 아이들에게 바가지를 들이댄 엄마라니. 몇 달 동안 떠나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했던 딸이 실망할까 걱정되기도 했겠지만, 유학시절 집과 공항이 30분 거리라는 데에 우쭐대며 2시간 전에 갔다가 체크인도 못 할 뻔 해 결국 생돈을 내고 비즈니스 티켓으로 바꿨던 순간을 함께 맞이했던 엄마였다. 그렇기에 내가 왜 조급해하는지를 제일 잘 알고 있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비행까지 4시간이나 남아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가장 구석에 있는 꽃까지 물 주기를 마친 우리는 문이 열린 곳이 있는지, 화장실 변기는 잘 잠겨 있는지, 실수로 빼지 않은 콘센트가 있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한 후에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는 전화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대문을 걸어 잠근 자물쇠가 잘 잠겨 있는지를 확인한 뒤, 공항으로 출발했다. 내 여행자 보험이 발효되는 오후 한 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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