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 상황에서 화를 안 낼 수가 있어?”
내 육아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의 말이었다.
화내지 않는 엄마.
정말 나는 화를 내지 않는 엄마였다. 사실 화를 잘 참을 줄 아는 엄마였다는 말이 더 정확할 거다.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는 적당히 화를 눌러가며 나이스 한 엄마의 모습을 유지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아이가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두 아이들이 싸우기 시작하면서 세상 처음 겪어보는 화의 감정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원래의 내 방법대로 그 감정들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몸에 힘을 줬고, 그게 어려우면 아이들이 보지 않게 옷장 안으로 몰래 들어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곤 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자고 일어나 눈을 뜸과 동시에 예민한 감정도 함께 눈을 떴다. 오늘은 얼마나 아이들이 싸우려나, 오늘은 내 귀가 얼마나 멍멍하려나, 얼마나 참아야 하려나 하는 불안한 감정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두 아이들은 주로 ‘내 것이야’로 싸웠는데 화를 참는 엄마였던 나는 그렇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아이들의 화난 마음을 마주하는 일이 참 어렵고 힘들었다.
화를 내지 말라고 해야 하나.
화가 나면 참아야 한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화가 날 텐데, 던지는 건 안되고, 때리는 것도 안되면 아이들은 어떻게 화난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화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느 정도가 괜찮은 걸까?
아이들이 그 정도를 알까?
화난 감정에 관한 그림책을 살펴봤다.
불을 뿜을 만큼 화가 나고,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싶고,
폭발할 것 같은 화난 모습들이 보였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다 나도 시원하게 한번 감춰 두었던 화를 드러내고 싶어 졌다.
'맞아! 참아야만 하는 감정은 아니야. 그럼 어떻게?'
방법을 찾기 위해 화난 감정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그동안 내가 화를 냈던 순간의 상황과 그때의 기분, 당시 내가 원했던 것들에 대해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책으로 화난 마음을 살피기도 하고 아이들이 화내는 순간을 감정을 뺀 채 지켜봤다. '도대체 넌 누구니?’라는 심정으로 화난 감정을 파고들었다. 알 수록 어렵다 생각했고,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확신 없는 시간을 보내던 어느 순간 조금씩 화난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화난 마음을 나쁜 마음이라 생각했구나. 그래서 아이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구나.'
아닌데, 나쁜 마음이 아닌데, 위험하다 느낄 때, 불편하다 느낄 때 나를 지켜주는 꼭 필요한 마음인데 그것도 모르고 참 오랫동안 오해했다.
아이들과 나를 위해 ‘건강하게 화를 내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도의 크기를 알 수 없는 감정이라 더 어려운 것 같아 눈에 보이는 표로 만들었다.
총 5단계로 화난 감정을 나누고 그 단계에 따라 할 수 있는 화의 표현들을 글로 적었다.
종이에 적힌 화의 단계를 보며 말했다. 1~3 단계는 일상에서 허용될 수 있는 화난 마음의 크기이고, 4단계는 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할 때, 나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할 때 쓸 수 있는 화난 마음이라고 했다. 5 단계에서 나를 때리는 행동은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주의도 주었다.
아이들은 당시 불편한 상황에서 바로 4번의 화를 내는 일이 많았다.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물건을 던지려고도 했다. 화의 단계를 보며 4번의 화를 1~3번의 화로 조절하고 4번의 화는 위험에 빠질 때 쓰자고 했다.
더불어 '나 화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나' 화법은 '나'를 주어로 감정의 군더더기를 빼고 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말하기 방법인데 이런 식이다.
-엄마는 네가 밥을 먹을 때 삐뚤게 앉아있으면 넘어질까 봐 신경이 쓰여. 그래서 밥 먹을 때는 바르게 앉아주면 좋겠어.
-나는 네가 내 물건을 말도 없이 가져갈 때 화가 나. 가져가고 싶을 때는 물어봐주면 좋겠어.'
화난 마음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과 말로 표현한다는 건 꽤 어렵지만 꼭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 어려운 것을 엄마도, 아빠도 배우고 있으니 함께 배워보자고. 배워야 하는 화난 마음, 엄마 아빠도 배워야 하는 화난 마음이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화내는 방법을 배워갈 때였다. 화라는 감정의 단계를 아는 아이가 어느 날 평소처럼 4번의 화를 바로 쏟아 내려다 한번 멈칫한 날이 있었다. 그리고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정우야, 줘! 그건 형아 장난감이야."
화난 마음의 단계를 조절하는 아이의 노력이 보였다.
"그렇지! 그거야! 4번의 화를 내고 싶었을 텐데 잘 조절했어. 진짜 애썼어!"
더 큰 화를 내고 싶었는데 참아서 억울하려나 싶어 아이 표정을 살피니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이렇게도 화난 마음이 전달된다고?'의 표정이었다. 나도 아는 표정. 나에게도 있던 표정이었다. 아이도 나도 화난 마음을 다루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종종 3,4번 화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할 때도 있다. 아이가 물건을 던지려는 제스처를 보일 때, 소리를 있는 힘껏 지르려고 몸에 힘을 주는데 조절이 쉽지 않아 보일 때가 그렇다. 그럴 때는 바로 개입을 한다.
"4번이 되지 않게 조절해야 해."
그런데 4번의 화를 내야 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는 나의 화난 마음이었다. 산책길에 둘째 아이가 스쿠터를 타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서 한참 앞으로 간 적이 있었다. 멈추라고 소리쳐도, 아이 이름을 수차례 불러도 듣지 않는 아이였다. 노련하게 스쿠터를 탈 줄 아는 실력 탓에 빠르게 멀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순간 이렇게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과 무서움에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를 향해 뛰면서 생각했다. 달리기 속도가 스쿠터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어쩌지, 저 모퉁이를 돌면 눈앞에서 안 보일 텐데 하는 무거운 걱정을 매단 채 달려 가 아이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길 한 복판에서 아이에게 소리를 쳤다. 4번이었다.
"엄마 없이 혼자 가는 건 위험한 거야! 무서운 거야!"
놀람과 무서움의 크기에 따른 화가 30개월 아이에게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첫째 아이와 왜 그런지 모르는 둘째 아이.
"엄마 지금 4번의 화가 났어! 집으로 가자!"
집에 돌아와 손을 씻기고 난 뒤, 두 아이들을 앉혀놓고 화난 마음을 전했다. 둘째 아이를 잃을까 봐 무서웠다고, 놀랐다고,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고. 그게 엄마의 4번의 화였다고.
숫자로 말하는 화가 정말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 육아가 한결 편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수치화해서 기준을 정하니 나의 화난 마음을 아이들에게 드러내는 일도, 아이들의 화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도, 아이들에게 화난 마음을 알려주는 일도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옷장에 몰래 들어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예민한 감정을 가진 채 아침에 일어나는 일도 없다. 화를 내지 못한 채 끙끙대던 엄마는 이제 '숫자'와 '나 화법'을 사용해서 적당히 화를 낸다. 화를 내고 난 뒤, 죄책감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에는 느긋함이 채워졌다. 그 느긋해진 마음을 딛고 하루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이들과 나에게는 1~3단계까지의 화가 수시로 찾아온다. 가끔 4번의 화난 마음이 '나도 와도 되냐? 기웃거리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지금은 아니야!'
요즘 옷장 속 벽면에 붙은 거울 속에는 화난 마음을 감추려 숨어들었던 예전의 나 대신 화난 마음에 홀가분해져 느긋해진 나의 웃는 얼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