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
글 : 허은미 / 그림 : 김진화 / 여유당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몇몇 분들이 불룩해진 배를 보며 아들일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아들이 어울릴 것 같다고도 했다.
아들을 키울 것 같은 엄마.
칭찬 같기도, 칭찬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말을 들으며 아들 키우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뱃속의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가 초두의 관심사일 때, 아들 키우는 육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들들은 소파로 블록놀이를 한다고 했고, 방문에 구멍이 나는 일은 평범한 일상이라고 했다. 아들 키우는 엄마의 목소리 톤은 굵어지고, 말은 짧게 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첫째 아이는 딸이 좋다며, 여자에게는 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첫째 아이 성별을 아들이라고 알려주었다. 아이 둘을 계획했던지라 둘째를 딸로 하면 되지 하며 괜찮다 생각했는데 첫째 아이 4살 때 둘째 아이가 생겼다. 그런데……
'아이가 아빠를 닮았네요.'
병원에서는 둘째 아이가 아빠를 닮았다고 했다.
'아빠를 닮은 딸이라는 건가?'
아닌 걸 알면서도 생각은 그렇게 했다. 나중 가면 바뀌는 경우도 있다길래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절대 바뀔 수 없는 아들이라고 했다.
그날, 산부인과 로비에 앉아 집에 가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도 샤랄라 한 여자아이 구두 한번 신겨보고 싶었는데, 나도 포슬포슬한 발레 옷 한번 입혀보고 싶었는데, 여자에게 딸은 꼭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들 둘 엄마’라는 타이틀은 왠지 억척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불곰에 잡혀 간 우리 아빠>는 엄마가 좋은 '이유'가 필요한 아이의 고민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림책이다. 엄마가 좋은 이유를 찾다 아빠에게서 엄마가 불곰이라는 말을 들었다. 배낭여행 중 숲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불곰이 나타나 구해주었고, 그 고마움에 결혼까지 했다고.
“쉿! 이건 비밀인데, 네 엄만 사람이 아니라 불곰이야, 진짜 불곰."
"엄마가 아침마다 으르렁대는 소리 들었지? 그게 어디 사람이 낼 소리냐?"
왜 하필 불곰인가 찾아보니 곰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종이란다.
'이 아빠 너무하네.’
내 남편은 아니지만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어 화가 나려는데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를 아이가 또 믿는다. 아이가 생각한다. 무시무시한 불곰 엄마에게 잡혀가는 여릿여릿한 아빠.
외할머니댁에 간 아이가 할머니가 꺼낸 사진첩 속 엄마의 사진을 본다. 아기였을 적의 엄마, 젊었을 때의 엄마, 그리고 나와 닮은 엄마. 불곰은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지금 같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엄마가 불곰으로 변하게 된 이유를 생각한다. 불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엄마.
그 장면에 머물다 보니 첫째 아이의 지난 말이 떠올랐다.
“엄마 목소리가 예전에는 여자 같았는데, 지금은 남자 같아요."
아이 말에 내가 목소리가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외부 수업 중 가족을 동물에 비유해보던 날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내 눈치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우성이가 엄마는 코끼리 같다고."
코끼리라니. 이유를 물으니 목소리가 크고 쿵쾅거리며 다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사슴도 있고, 토끼도 있고, 다람쥐도 있는데 코끼리는 너무했다 내색하고 싶었지만 아이의 솔직함에 딴지를 거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그날 나는 코끼리가 되었다. 목소리가 크고 쿵쾅거리는 코끼리.
지난 아이의 말을 떠올리니 불곰으로 변한 엄마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다.
'나도 변했는데.'
친정엄마를 만나는 날이면, 엄마는 날 찬찬히 훑어보시며 한 마디씩 하신다.
"네가 피부는 참 하얗고 고왔는데."
"네가 예전에는 손가락이 참 가늘었는데."
"네가 예전에는 그림 그린다고 자세가 참 꼿꼿했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내 피부를 살피고, 내 손가락을 살피고, 내 자세를 살펴본다.
'맞아! 그랬었지.'
육아를 하며 변한 내 모습이 불곰으로 변한 엄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변하려나. 난 또 얼마나 큰 코끼리가 되고, 얼마나 더 목소리가 바뀌려나. 나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려다 이내 마음을 바꿨다.
'아들 둘 키우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암!'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며 둘째가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했던 그날의 나를 떠올렸다. 아직까지는 소파로 블록놀이를 하지도, 문에 구멍을 내지도 않아서 그런가 억척스러워질까 겁먹었던 아들 육아 치고는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아이의 반짝이는 구두도 없고 포슬포슬한 발레복도 없었지만 반짝이는 구두보다, 포슬포슬한 발레복보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악당, 괴물, 도둑 등 나쁜 역할은 모두 내가 해야 하고, 힘으로 이길 수 있지만 종종 처참하게 져 주어야 하고, 꺼지지 않는 에너지에 장단도 맞춰주어야 하지만 나름 아들 키우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과 지내다 얻게 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코끼리처럼 힘이 좀 세지.'
'악당도 도망가게 할 남자 목소리는 아무나 얻는 게 아니지.'
오랜만에 어릴 적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꺼냈다. 아이들에게 엄마를 찾아보라고 했다. 어떤 사진에서는 바로 찾고, 어떤 사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 여기 있네. 여기.'라고 짚어주며 아이들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났다. 신기해하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엄마가 좋아?"
"응."
"왜?"
“우리를 낳아주고 사랑해주고 보물이라 해주고, 소중하다 해주고, 많이 안아주고……”
“코끼리 같아도?”
뒤끝을 살짝 내 비치지만 아들이 알리 없다.
"그럼! 코끼리가 얼마나 좋은데."
“목소리가 남자 같아도?”
"그럼! 남자 같아도 엄만 엄마지."
아이 대답에 남자 목소리를 가진 코끼리 같은 엄마는 웃었다.
'내가 어때서!'라며 변한 내 모습에 뻔뻔해져 본다.
'내가 어때서!'라며 변한 내 목소리에 당당해져 본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해 본다.
'이 남자 목소리를 가진 코끼리 같은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큰 너희 편이야. 아쉽겠지만...... 바꿀 수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