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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st Feb 25. 2019

번역기는 외국어 교실의 반역자인가

 번역기가 있는 한국어 수업을 상상하다.

얼마 전에 15주 이상 한국어를 배운 초급 수준의 외국인 학생 한 명과 상담을 했다.


보통 이 정도 배웠으면 한국어로 간단한 생각은 표현하는 게 정상인데,  이 학생은 간단한 내 질문도 못 알아 먹고, 말을 못 알아 먹으니 "몰라요"만 반복했다.


난감해 하다가 결국 스마트폰의 번역앱을 켜서 번역기에 질문을 입력했다.


"왜 한국어를 공부해요?"(이런 기초적인 질문도 못 알아 먹는데, 내 수업 시간에는 앉아서 뭘 했단 말인가...)


내 스마트폰 화면의 번역된 문장을 본 학생도 자신의 스마트폰 번역기를 사용해서 뭔가를 입력한다.


학생이 한국어 번역 결과를 보여 준다.

 

"한국어 공부하는 게 취미예요."


한국어 공부가 취미인데 한국어를 못 알아 먹어서 번역기로 겨우 대화를 나누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벨피쉬의 등장


요즘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사회적인 화두이다. 특히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지식 노동 영역도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 입장에서도 그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글 번역기나 네이버 파파고 같은 번역기에도 향상된 인공지능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 외국인 학생과 상담을 하면서 기초적인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기계 번역 덕분이다. 이제 더 이상 'I could not save my wife.'를 '저는 제 아내를 저장하지 못했습니다.'로 번역하는 개그를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내 입장에서도 번역기의 도움으로 외국어 원서나 외국어 논문 읽는 것이 예전에 비해 훨씬 수월해졌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학생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학생들도 번역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기계 번역기의 성능이 날로 개선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어 교사'라는 내 직업 정체성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의 번역기는 조작도 간편한데다가 공짜다. 그런데 한국어를 배우려면 시간과 돈, 노력이라는 자원이 든다. 만약에 한국의 정규 한국어 교육 기관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면 학비, 생활비 등의 비용이 만만치 않다. 만약 번역기 성능이 지속적으로 향상되어서 오류는 좀 있다 쳐도 이해 못 할 수준이 아니라면 돈, 고생, 시간, 노력을 들여 가면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할까?




배우는 재미


사실 비용이나 효율성 면에서 인공지능 번역기가 앞선다고 해서 기존의 외국어 학습을 완전히 대체한다고 보는 건 단순한 생각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비용을 떠나서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아간다는 보람과 재미 말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의외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취미라는 학생들을 종종 만난다. 내 경우는 유독 스웨덴 학생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 내가 가르쳤던 한 스웨덴 학생은 한국어를 배운 뒤에 또 일본어를 배우러 일본에 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인데 대학교는 안 가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그냥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답했다.


고등학교 나오면 대학교 가는 게 상식인 나라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그 학생의 대답이 충격적이고 부럽기까지 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굳이 대학교를 진학해야한다는 부담도 적고 다른 나라로 유학 가는 학생들에게 국가에서 다양한 장학금과 아주 싼 이자의 대출까지 지원해 준다.  


외국어 학습이 취미라면 외국어를 배우는 보람과 재미를 더욱 잘 느낄 것이다. 그리고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문화도 접하게 되는데 색다른 문화를 접하는 재미도 돈이 들더라도 놓칠 수 없는 외국어 학습의 재미 아닌가.


이렇게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번역기 성능이 90% 이상으로 이해가 되는 수준이라면 돈과 시간을 들여 가면서 한국어를 배우겠는가?'(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래도 직접 배운다는 학생과 번역기 쓴다는 학생은 거의 반반이다)


한국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여학생 중에서는 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이 꽤 있다.


"저는 제가 직접 배워서 아이돌 오빠하고 대화하고 싶어요."


비슷하게 한국 드라마나 영화 등 한류 콘텐츠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도 한국어를 직접 배우는 수고와 노력을 감수하겠다고 대답한다. 이런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에서 보람과 재미를 스스로 찾을 줄 아는 바람직한 학생들이다. 실제로 이런 자발적인 학습 동기를 가진 학생들은 번역기가 있고 없고에 관계 없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답을 한다.


결국 번역기라는 기계에 맞서는 배움의 힘은 일차적으로 재미나 보람과 같은 자발적인 학습 동기에 있다.




바닷물을 그릇에 담으면


하지만 여느 교실과 마찬가지로 한국어 교실도 배우는 재미를 스스로 찾을 줄 아는 학생만 앉아 있는 환상의 공간이 아니다. 나 역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열정을 끝까지 지속시켜 나가는 학생보다 대학교 진학이나 취업이라는 목표가 있지만, 그런 목표를 배우는 재미와 연결 짓지 못하는 학생,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배움의 열정을 잃어버리는 학생을 더 많이 만났다.


이런 학생들이 클릭 한 번에 한국어를 모국어로 바꿔 주는 번역기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실제로 번역기가 학습자들의 학습 의욕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이거 누가 좀 연구 주제로 다뤄 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아니, 이렇게 쉽게 번역이 되는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면서 앉아 있나'와 같이 힘들여서 한국어를 배우는 상황에 회의감이 생기게는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은 번역기가 완벽에 가깝게 번역해 낼 정도로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이 전제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구글의 번역 전문가조차도 인공지능은 언어를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번역기의 한계에 대해서도 언젠가 글로 다뤄 볼까 생각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를 이해한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범위가 넓다.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바닷물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닷물을 작은 컵에 담으면 그 안에 담긴 물은 끓이고, 마시고, 버리는 등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가 있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즉 한정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언어 사용법을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커피숍에서 주문하는 대화처럼 말이다. 커피숍에서 직원이 하는 말, 손님이 하는 말은 변수가 많지 않고 예상이 가능하다. 만약 인공지능이 커피숍 대화를 학습한다면 주문이나 손님 응대 정도는 충분히 해 낼 거다. 왜냐하면 커피 주문이나 식당 예약 등과 같은 대화는 정보를 제공하고 확인하는 단순한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용하는 어휘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 구글은 자사의 인공지능 음성비서로 미용실과 식당 예약하는 걸 공개했다. '음'과 같은 간투사는 물론이고 대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흘러 가도 아무 문제 없이 시간 예약에 성공하는 것을 보면 마냥 놀라워 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일반적인 초급 단계의 한국어 회화 교육도 주문하기, 배달하기 등과 같이 한정된 상황을 가정해 놓고 그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화를 배운다. 상황을 한정해야 가르치고 연습시키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상황뿐만이 아니라 급수에 따라서 배우는 어휘와 문법도 제한이 되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지금과 같이 한정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연습하는 방식은 기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인공지능까지 갈 것도 없다. 정보를 제공하고 확인하는 수준의 단순한 서비스는 스마트폰의 앱으로도 해결하는 시대 아닌가. 요즘 그런 스마트폰앱들이 확산되는 걸 보고 있으면 간단한 말하기는 편리하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보인다.


그런 욕구와 기술이 주는 편리함은 무시하고 '넌 한국어 학습자니까 번역기나 앱 사용하지 말고 한국말 사용해서 직접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해.'라고 강요 또는 설득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설령 강요나 설득을 했다 쳐도 수업 끝난 후에 학생들의 번역기 사용을 또 통제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구분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을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거기에 비춰 보면 나는 정확히 번역기가 (언젠가는) 해 내고도 남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학생들 중에서는 이런 의문을 품고 지금 배우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는 없을까?




촉진자로서 번역기


대부분의 한국어 어학당 교재에는 한 단원이 끝나면 대개 '더 읽어 봅시다'라는 이름으로 문화를 소개하는 코너가 붙어 있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수업 진도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집에서 읽어 오라고 넘어 갈 거다.


어쩌다 그날 수업 진도 다 끝내고 시간 여유가 남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 '더 읽어 봅시다'의 내용으로 학생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럴 때면 학생들은 보통의 수업 시간과는 달리 아주 적극적으로 바뀌어서 그 주제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은 인터넷도 찾아 가면서 이야기를 하려고 기를 쓴다. 수업 시간이 다 끝나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그렇게 조용하던 학생이 맞나 싶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내가 가르치는 게 정말로 '의사소통'인지 아니면 '수업 진도'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큰 주제만 던져 놓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학생들은 더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변한다. 가르쳐 주지 않은 표현도 스스로 찾고 번역기까지 써 가면서 말이다.


역설적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현재 실력을 벗어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번역기를 사용했을 때 번역기는 드디어 바보가 된다. 초급, 중급, 고급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언어는 번역기가 계산해 내기 어려운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본성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바보가 된 번역기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오히려 의사소통의 출발점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 간에 의미를 협상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끼리 대화할 때도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 들으면 다시 질문을 하면서 서로 간에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나. 번역기가 불완전한 번역을 내 놓더라도 교사와 학생은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의미를 확인하면서 표현을 수정해 나갈 수 있다.     


결국 번역기는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주고 의사소통의 기회도 만들어 주는 촉진자이다.




번역기라는 질문


번역기의 발전으로 통번역사를 비롯해서 관광 가이드 같은 직종들은 일자리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문어 텍스트는 몰라도 구어 텍스트를 번역기가 번역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상반된 예측이 나온다.


미래야 알 수 없는 것이지만, 2년 전 바둑을 시작으로 이제 인공지능은 훨씬 더 복잡한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에서도 프로게이머를 압도하고 세계 토론 챔피언과의 토론 대결에서도 대등한 대결을 펼치며, 미용실 예약과 식당 예약도 척척해 낼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복잡한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외국어 교육 종사자들도 언어의 복잡성과 애매모호함만 붙잡고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TV가 등장했을 때 영화 종사자들은 곧 영화가 망할 거라는 비관 속에서 스스로 살아 남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했다. 그 결과가 바로 컬러 화면과 대형 화면, 가로가 넓어진 스크린에 이어 최근의 3D 영화라는 형식과 영상미와 스펙터클을 극대화한 영화 콘텐츠들이다. 경쟁 속에서 TV와 영화는 각자의 영역을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키며 공생하고 있다.


이제 성능이 월등히 개선된 번역기도 외국어 교육 생태계에서 한 영역을 차지할 날이 다가왔다. 외국어를 가르치는 교실도 이 생태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번역기와 차별화되는 교실 수업만의 독자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가 되었다. 그 질문은 클릭 한 번으로 시간과 돈, 노력을 모조리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도구가 있음에도 굳이 교실이라는 공간에 모여서 고생하면서 외국어를 배워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번역기가 수업의 촉진자로서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도 그 질문이 해야 할 일에 포함된다.


결국 번역기의 발전은 외국어 교실에 위협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기회인 셈이다. 외국어 교육 종사자들이 번역기와 차별화되는 수업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고민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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