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의 빌보드 1위,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오징어 게임’과 ‘APT.’의 전지구적 열풍까지, 최근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해외성과가 눈부시다. 게다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자리한 ‘인정 욕구’ 충족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류는 해외 수용자가 한국의 콘텐츠와 문화를 좋아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이 있기까지 수십 년간 한국 문화산업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누군가의 강요나 조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류도 마찬가지다. 한류의 초기 모습인 1990년대 말 중국의 한국 드라마 열풍, 대만의 클론 열풍은 정부가 계획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류는 대중문화의 산업화와 상업화를 통해 이뤄낸 한국 문화콘텐츠의 오락적 품질 향상, 미디어시장 개방의 확산에 따른 인접국의 해외 콘텐츠 수입 확대에 대한 한국 콘텐츠의 대응, 동아시아 문화권의 정서적 공감대 등 여러 요소가 우연히 만나 탄생한 산물이다. 질문은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한국 문화콘텐츠의 오락적 품질과 시장 경쟁력은 어떤 경로를 거쳐 향상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위해 또 수많은 요소를 거론해야 할 것이다. 일테면 정치 민주화에 뒤따른 문화·미디어 관련 법제의 정비와 개선, 국내에서 펼쳐진 시장경쟁의 긍정적 효과,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된 풍부한 스토리, 해외 문화의 수입과 전유에 따른 글로벌한 감성과 제작 규준의 습득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이 한류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류에 관한 담론은 단순하지 않으며, 그 복잡성을 직시함으로써 논의가 더욱 정교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의 속에 정부의 역할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첫째, 정부의 역할 중 하나가 문화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한류 현상이 활발해짐에 따라 국내 언론이 정부의 여러 한류 관련 정책과 방안을 더 많이 보도하게 되었는데, 한류에 관심이 높아진 외국 언론이 이를 받아 쓰고 한류를 “한국 정부가 만들었다”는 식의 보도를 한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과 문화 현상은 정부나 특정 세력이 원격조종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셋째, 한류가 한국의 국가 브랜드와 소프트 파워를 대표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 정부 역할론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제 한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첫째 흐름은 해외 팬들이 주도하는 자발적인 문화 현상이다. 이들은 한류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재해석하고 확산시키는 '문화 큐레이터' 역할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맥락에서 한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전 세계 팬들과 소통한다. 예를 들어, K-pop 댄스 커버 영상과 리액션 비디오를 제작하거나, 한국 콘텐츠를 자국어로 번역하고 공유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한류를 확산시키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와 기업, 미디어가 주도하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로서, 한류를 국가 브랜딩과 경제적 이익 창출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시도이다. K-접두사 붙여 명명하기나 ‘한류월드’ 테마파크 건설 계획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노력은 한류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영향력을 다양한 분야로 넓히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최정봉 교수는 이를 한류가 아닌, ‘한류화’(Hallyu-hwa)라는 별도의 것으로 인식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두 개의 흐름은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때때로 충돌한다. ‘제도화’ 프로젝트의 관료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접근은 한류의 본질인 팬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해치기도 한다. K-pop의 글로벌 성공은 기획사의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아티스트들의 재능, 땀, 눈물이 만난 결과다. 정부의 역할은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그쳤다. 게다가 정부가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는 순간, 해외에서는 한류를 문화제국주의적 캠페인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과거 이명박 정부가 주도했던 한식 세계화 프로젝트의 실패에서 보여지듯이, 관료주의적 접근과 해외 소비자들의 실제 취향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그런데 관료주의적 접근의 폐해를 비난하는 것과 별도로, 한류 ‘제도화’의 이면에 숨겨진 열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식민지 경험과 민족상잔의 아픔을 딛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집단적 염원이다. 그 염원이 제도화라는 행위로, 창작의 에너지로, 한강의 기적으로 표출되고 또 결실을 본 것이다.
결국 한류의 미래는 이 두 흐름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와 기업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팬들의 자발성을 억누르는 순간 한류의 생명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한류가 글로벌한 문화 현상으로 지속·발전하기 위해서는 한류가 직면한 여러 도전을 직시하고, 자발적 팬덤 문화와 전략적 국가 정책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잡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부는 창의성을 존중하는 문화 생태계를 조성하고 문화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하며, 동시에 한류의 자연스러운 확산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더불어, 한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에도 시선을 던져야 한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성과나 국가 브랜드 제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가치와 매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또 발전시키는가에 관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를 포함한 여러 문화예술 영역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해야 하며, 문화의 가치에 관한 열린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한류의 글로벌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화적 갈등과 오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적 차원에서 문화 간 이해와 소통을 증진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또 시행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류는 우연적 요소가 만나 시작되어, 점차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타협하며 나아가고 있다. 자연발생적 현상인 ‘한류’와 정책적 노력인 한류 ’제도화’의 조화로운 발전이 한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정부와 업계, 그리고 창작자들이 이 미묘한 균형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한류는 유행을 넘어 세계 문화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류의 성과가 한국 사회 내부의 문화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한류의 글로벌 성공이 국내 문화 생태계의 균형 있는 발전과 문화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연결될 때 한류 ‘제도화’는 비로소 진정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참고문헌
심두보 (2024). 『한류가 뭐길래』. 어나더북스.
Choi, JungBong (2015). “Hallyu versus Hallyu-hwa: Cultural Phenomenon versus Institutional Campaign,” in Hallyu 2.0: The Korean Wave in the Age of Social Media, eds. Abe Markus Nornes and Sangjoon Lee.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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