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본 흑백영화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제주 4.3을 그린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였다. 디테일한 감정을 집중하게 한 흑백 영화 <콜드 워>는 흑백을 통해서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게 하는 힘이 있었다. 구도와 함께 명암의 톤이 주는 감동은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흑백영화였다. 이준익 감독은 흑백 사진 속의 윤동주 시인을 사실적이고 담백하고 정중하게 그렸던 <동주> 이후 또 다른 흑백 영화 <자산어보>를 선보였다.
영화 <자산어보>는 흑백으로 표현하여 단순화된 시각화로 인물의 세밀한 표정이나 내적인 감정선, 사물의 형태나 윤곽을 더 도드라지게 하거나 명암의 그라데이션을 통한 질감의 두드러짐이 특징이다. 색 정보 이면에 가려진 다양한 정보에 대해 집중하고 보면 흑백영화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 강한 명도 대비는 거칠지만 강렬한 느낌을 만들고 낮은 명도 대비는 부드러운, 한편으론 희미하고 심심한 표현이 가능하다. <자산어보>는 강한 명도 대비 대신 부드러운 명도 대비를 택했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흑백영화 <동주>는 흑을 강조한 영화, <자산어보>는 백을 강조한 영화이다. 사람의 피부색과 표정에는 신체적인 건강과 감정, 생활환경, 경제적 사회적 지위 등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각은 빠르게 이 정보를 인지하고 지각한다. <자산어보>에서는 피부의 거침과 부드러움 같은 질감과 피부색으로 계급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특히 흑산도를 생활 터전으로 살았던 이들의 흑백으로 표현한 얼룩한 피부색보다 피부 질감 표현이 약간 아쉽기도 했다. 창대의 손까지 집중해서 보곤 했다.
집단적 관점에서 큰 역사적 사건을 위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 대신 정약전이란 인물에 대한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끈다. 인물을 좀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상대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에선 송몽규(박정민)가 <박열>의 후미코(최희서)가 그 역할을 했다. 정약용(류승룡)은 정약전(설경구)을 또렷하게 보여주기 위한 상대이다. 이준익 감독은 작품마다 버디물적 성격으로 만들어 한사람 생의 모습을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한사람도 뚜렷하게 만들어 비교하게끔 한다.
신유박해 이후 아우인 정약용 (류승룡)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을 악용한 걸 바로잡기 위해 목민심서를 쓴다. 흑산도로 유배를 온 정약전은 다양한 해양 생물들을 관찰하여 그 생김새와 습성, 분포, 나는 시기와 쓰임새 등을 연구하고 정리했다. 사실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담고 생물들을 실생활에 먹고 기르고 아플 때 어떻게 활용했는지 담아 민중을 사랑했던 학자의 마음도 엿볼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는 창대(변요한)가 있다. 창대의 이상은 정약용에게 몸은 정약전 옆에 있다. 창대(변요한)는 실존 인물이지만 "가난하다"는 기록 외에는 창대의 삶에 대한 뚜렷한 배경이 없다. 창대란 인물에 대해 허구의 서사를 만들고 정당성을 부여하여 영화 <자산어보>는 영화적 재미를 키운다. 애절양(哀絶陽) 사건을 넣어 조선 후기 사회의 부패와 구조적 부조리에 기인한 참담한 모습 속에 창대의 심리적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성리학에 대한 동경과 목민심서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꿈을 세상에 펼치고자 했던 창대와 성리학으로 상처를 받고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배 생활의 끝은 기약이 없는 정약전 사이의 간극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늘이 주어진 시간은 유한했다. 조선 후기 어지러운 세상을 살다 간 이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신분과 나이와 사상을 초월해 우정을 나누며 <목민심서>의 길을 가든 <자산어보>의 길을 가든 그 길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각자의 길을 갔다. 자연의 위대한 풍경 속에 인간의 존재는 담백하고 위트있게 그려졌다. 더욱더 깊어진 이준익 감독의 흑백 세계는 그렇게 붓을 움직여 한폭의 수묵화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