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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n Park Apr 22. 2021

"Who exactly am I?", 영화 <더 파더>


사진 제공 - 판 씨네마 (Pancinema)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앤서니(안소니 홉킨스)를 찾아온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자신은 런던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걱정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13분이 지나면 극의 분위기는 상상하지 못하게 흘러간다.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앤서니(안소니 홉킨스)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여성(올리비아 윌리엄스)으로 변하고 이혼하여 존재하지 않은 딸의 남편이 나타난다. 앤서니의 가까운 사람들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뒤섞으며 제자리에 놓기도 한다. 문을 닫으면 앤서니가 있던 곳은 변한다. 집이 바뀌고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저녁 8시에 저녁을 먹지만 햇빛은 한가득 쏟아진다. 복잡한 틀 안에서 조용하게 일어나는 이 모든 것에 놀라고 당황스럽지만 결국 그것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앤서니는 그에게 보이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시계에 집착하는 것은 무너져가는 정신 상태로 인해 시간과 장소에서 갇힌 자신을 위한 방어기제이다. 파편화된 그의 현실에 무너지지 않고 지탱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시계를 찾지 못한다. 치매 (Dementia) 환자의 산산이 부서지는 삶을 일인칭 시점에서 생생하게 그려 치매와 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희미한지 실감 나게 한다. 그런 과정을 겪는 앤서니의 불안과 좌절을 그대로 관객에게 옮겨 놓는다.



<더 파더>는 물리적인 공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앤서니 (안소니 홉킨스)의 혼란에 접근한다. 절제되어 변경된  컬러와 장식, 레이아웃, 가구, 벽의 그림, 타일 등 시각적 조작은 앤서니 그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혼란을 준다. 마치 어떤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봤냐고 관객의 심리 테스트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각적인 것을 활용하여서 영화는 순식간에 매끄럽게 공간이 변화하며 이동하여 집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앤서니가 아님을 인지 시킨다. 문과 벽 등으로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또 다른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 안에 홀로 앤서니를 가두고 있다. 이런 이차 프레임은 앤서니의 고립을 더 형상화하고 그의 기억과 시간은 그 안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진실과 허구에 갇힌 앤서니의 모습을 공간은 잘 표현하고 있다. 카메라 워크는 굉장히 정적이며 앤서니는 그 안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삶이 흔들린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의 시점으로 더 깊게 파고들 수 있게 한다.




사진 제공 - 판 씨네마 (Pancinema)



병이란 것은 소모적인 것이다. 병을 앓는 당사자도 지켜보는 가족과 주변인들마저도 몸과 마음을 소진하게 만든다. '어리석다’는 뜻의 ‘치(痴)’와 ‘미련하다’는 뜻의 ‘매(呆)'를 사용하는 이 병은 정신이 혼미하고 밝지 못하여 혼자서는 살 수 없는 환자를 말한다. 그 가족과 주변인의 고통과 혼란한 삶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 병을 앓고 있는 당사자인 앤서니의 입장을 집중해서 다뤄서 앤서니의 시공간, 사람에 대한 인지 등의 혼란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앤의 고통은 어쩌면 크게 안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앤서니에겐 앤의 고통은 존재하지도 않은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서니를 돌보는 일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온 로라(이모겐 푸츠)를 만나서는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보이기도 하고 딸 앤을 비난하기 위해서 죽은 루씨를 소환하기도 하는 이기적인 성향도 보인다.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감정만 생생한 아버지 앤서니를 두고 떠나야 하는 딸은 통곡하며 울지도 못한다.



원작자인 플로리안 젤러의 동명 연극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프랑스 연극을 영어 영화로 만들면서 파리였던 배경이 런던으로 바뀌었다. 적절히 음악을 삽입하여 인상 깊게 하였고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를 통하여 스릴 넘치는 심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치매 환자에 대한 자체적인 이해보다는 주인공의 가족이나 주변인의 불행함을 증폭시키는 그런 스토리의 구성 대신  노년의 고통, 고통으로 인한 영혼의 잠식,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곡된 렌즈, 거친 몽타주, 현란한 특수효과, 흔들리는 카메라 같은 수단이 아닌 초점 없는 눈으로  "Who exactly am I?" 하는  말 한마디로  기억의 혼란 속으로 깊게  다가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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