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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m Jul 08. 2019

이것은 음악인가 ASMR인가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04


1. 올해 3월 발매된 에픽하이의 앨범 [sleepless in __________]은 선우정아와 크러쉬의 피쳐링, 아이유의 뮤직비디오 출연 등으로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발매 이후 정작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곡은 'Lullaby For A Cat'이었다. 이 곡을 고양이에게 들려줬더니 고양이가 실제로 잘 자더라는 제보가 (증거 영상과 함께) 계속해서 올라왔던 것이다. 곡을 만든 타블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고, 곡이 저주파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렇다는 식의 과학적 설명도 뒤따랐다.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기나 고양이뿐이 아니다. (불면증은 오히려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높은 비율로 발생한다.) 잠들지 못하는 이들은 잠에 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특히 무언가를 듣는 경우가 많다. 클래식 음악이나 잔잔한 음악, 또는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듣는다. 이것들은 수면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반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면 유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ASMR은 그 자체로 수면 유도를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물론 수면 유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ASMR도 많고 다양한 종류의 영상들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ASMR을 듣는 이유는 숙면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ASMR 시장이 가장 큰 나라인데, 워낙 충분히 잘 자기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2. Holly Herndon의 'Lonely At The Top'은 더욱 흥미로운 경우다. 이 곡은 평단의 지지를 받은 [Platform] 앨범의 7번 트랙으로,  실제 ASMR티스트인 클레어 톨란의 속삭이는 목소리와 다른 소리들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ASMR이다. 이 곡에는 음악의 3요소인 리듬, 멜로디, 화성이 하나도 없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나 악기의 연주 소리도 없다. 물론 앨범 중간에 skit이 들어가는 경우는 있지만 이 곡을 skit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연히 하나의 트랙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곡은 어디까지가 음악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멜로디와 화성이 없는 좋은 음악이 많아지고 있는 것처럼 리듬이 없는 음악도 듣기 좋기만 하다면 좋은 음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음악은 듣기 좋은 소리 자체를 탐구하는 ASMR과 닮아가지 않을까.



위의 두 곡에 더해,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아예 'ASMR'이라는 제목의 곡을 발표한 모 래퍼의 사례까지 보고 나니 ASMR이 대중음악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플레이리스트에서는 Whisper, Lullaby, Tingle이라는 3가지 키워드를 잡고 ASMR스러운(?) 음악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Whisper>





유튜브에서 대중음악에 속삭임이 쓰인 예시들을 정리한 <the evolution of whispering in songs>라는 영상을 봤다. 그 영상에 나오는 첫 곡이 Beatles의 'Good Night'이다. 드물게도 링고 스타가 혼자 부른 이 곡은 흔히 White Album이라고 불리는 [The Beatles] 앨범의   마지막 곡이다. 이 곡의 마지막에 이르러 모두에게 잘 자라고 속삭인다. 영화의 러닝타임에 맞먹는 2CD 93분짜리 앨범을 마무리하는 너무 멋진 방식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며 듣기에도 좋다.   Ariana Grande의 'Problem'과 Linkin Park의 'Papercut'은 속삭임을 사용하는 두 전형이다. 알앤비와 메탈  음악에서 모두 속삭임을 자주 쓰는데, 그 효과가 전혀 다르면서도 각각의 장르에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 신기하다.









이민휘의 ''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인 [빌린 입]의 수록곡이다. '꿈'의 전반부에서 허밍하던 화자는 후반부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속삭인다. (ASMR의 장르 중 하나로 자리 잡은 inaudible whisper의 일종처럼 들린다.) 앨범 타이틀곡인 '빌린 입'에서  '말할 수 없는 것'과 '들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떠올려보면, '말할 수 없는' 화자가 꿈속에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꿈속에서의 말이니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에 불과한 비극적인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레드벨벳의 'Somethin Kinda Crazy'는 곡의 하이라이트인 2분 35초경 예리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라는 속삭임으로 펀치라인을 만들어낸다. (이게 반응이 괜찮았는지 이후 'Talk To Me'에서 정확히 같은 위치에 예리의 내레이션을 넣는다.) 지난 편에 이어 또 나온 NCT U의 'Baby Don't Stop'은 훅 부분을 아예 태용의 속삭임으로 구성해서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준다. 정말 뮤비, 곡 구성, 가사, 안무 등 모든 면에서 흥미로운 곡이다.









속삭임을 랩의 방법론으로 차용한 래퍼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Metro Boomin의 'Don't Come Out The House'에 피쳐링으로 참여한 21 Savage이다. 이 곡에서 그는 랩 전체를 속삭임으로 하더니, 속삭임 랩을 이어가며 아예 'ASMR'이라는 제목으로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랩의 방식에 있어 다양한 실험을 해온 Kendrick Lamar는 'Untitled 04 08.14.2014'의 초반부에서 속삭임 랩을 선보인 바 있다. 참고로 나의 지인 중 한 명은 이 노래를 통해 헤드폰을 영업하고 있다. 좋은 헤드폰을 가지고 있다면 꼭 들어보시길.


 




<Lullaby>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잠을 청하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일은 아니다. 음악이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끼쳐  내분비와 스트레스 반응을 완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한 연구도 존재한다. (https://journals.plos.org/plosone/article?id=10.1371/journal.pone.0070156) 영국 사운드테라피 아카데미라는 단체에서는 잠을 잘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10곡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중 한 곡은 그 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카데미가 한 밴드와 콜라보해서 작정하고 세계에서 가장 편안한 음악을 만든 것이다. 그 곡이 바로 Marconi Union의 'Weightless'다. 나머지 3곡은 그저 제목에 Lullaby가 들어가서 골랐다. Sarah Vaughan의 'Lullaby of Birdland'는 같은 곡의 수많은 리메이크 버전 중 가장 좋기도 하고 잘 때 듣기에 좋은 버전이다. 올해 발표된 두 곡 James Blake의 'Lullaby For My Insomniac'과 Sky Ferreira의 'Downhill Lullaby'는 제목에 걸맞게 몽환적인 곡들이다.






<Tingle>







팅글(Tingle)이란 ASMR을 들다가 특정 소리를 들었을 때 기분 좋게 소름돋는 느낌을 의미한다. 팅글을 느끼는 소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의 목소리일 수도, 마카롱을 먹는 소리일 수도, 귀를 파는 소리일 수도 있다. ASMR에서 팅글을 느끼게 하는 소리가 있는 것처럼 어떤 뮤지션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소름돋게 기분 좋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보컬 지음의 목소리가 놀라운 사람12사람의 '빗물구름태풍태양'은 작정하고 소름돋게 하는 노래다.  블랙 사바스의 원곡을 전혀 다르게 리메이크한 The Cardigans의 'Iron Man'과 Tame Impala의 'Endors Toi'는 밤보다는 낮잠을 잘 때 들으면 좋은, 나른해지면서 아무것도 하기 싫게 만드는 노래들이다. Rhye의 'Count To Five'와 Moses Sumney의 'Don't Bother Calling'은 마이크 밀로쉬와 모세 섬니의 중성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노래들이다. 내 팅글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듯한 다른 보컬들 사이에 결이 많이 다른 마이크 밀로쉬의 우아한 보컬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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