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01
<고등래퍼 3>에서 처음 엠넷이 점 찍은 우승후보는 양승호와 권영훈이었지만, 실제로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 내고 우승까지 한 참가자는 이영지였다. <고등래퍼 3> 1회가 방영된 직후 이영지의 뛰어난 실력과 입담에 대한 반응들이 이어졌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동안 힙합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영지의 랩을 들으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반응이었다. 나의 경우만 봐도 어느 순간부터 여성혐오(를 포함한 여러 혐오)에 기반한 가사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힙합 음악을 상대적으로 잘 안 듣게 되었다. 음악을 즐기려고 해도 가사가 발목을 잡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위의 반응이 보여주는 것처럼 힙합에 여성혐오가 만연하다고 해서 힙합이 주는 즐거움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여성 래퍼들의 음악에 더 집중하는 것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싶다. 물론 여성 래퍼의 음악이라고 해서 여성혐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하다. (당장 'bxxxx'의 표현만 봐도 여성 래퍼가 쓰면 그 맥락이 달라진다.) 게다가 힙합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좋은 장르이기도 하다. 요컨대 힙합이라는 장르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여성혐오의 중심이 될 수도,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 래퍼들의 음악을 통해 후자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1. 여성 래퍼들은 랩을 잘하지 못한다거나, 타이트한 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진 이들에게 이 곡들을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 Little Simz, Nadia Rose, Lady Leshurr는 모두 영국 출신 래퍼다. Little Simz의 'Venom'은 말 그대로 숨 쉴 틈 없는 랩을 보여준다. 올해 나온 그의 앨범 [Grey Area]는 메타크리틱에서 무려 90점을 받았다. (Stormzy와 사촌 지간인) Nadia Rose의 'Skwod'와 Lady Leshurr의 'HORRID'는 뮤비를 원테이크로 찍어 그라임 장르의 강렬함을 더욱 배가시켰다. 'Skwod' 뮤비는 패션도 음악과 너무 잘 어울려서 뮤비의 일부분을 그대로 가져다 아디다스 광고로 만들어도 될 정도이다. 070 Shake는 힙합 명가 Def Jam 소속의 래퍼로, Kanye West나 Pusha T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I Laugh When I'm With Friends But Sad When I'm Alone'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압도적인 톤으로 랩과 노래에서 모두 출중하다. Nicki Minaj의 'Chun-Li'는 니키 미나즈의 뛰어난 랩 퍼포먼스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니키 미나즈의 디스코그라피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뛰어난 랩 실력을 가졌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2. 여성으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나간다는 점에서 여성 래퍼들의 음악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밝히고 음악을 통해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래퍼들이 있다. 슬릭의 '36.7'은 36.7%의 한국 남녀임금격차(OECD 국가 중 1위)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직설적인 가사와 더불어 두 개 이상의 리듬이 동시에 진행되는 '폴리리듬'의 작법이 쓰였는데, 서로 다른 두 개의 리듬이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Janelle Monae의 [Dirty Computer]는 여성이자 흑인이자 양성애자인 자넬 모네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어 교차성 개념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 자넬 모네는 노래를 정말 잘하지만 'Django Jane'에서 보여주듯이 랩만으로도 뛰어난 곡을 만들 수 있는 래퍼이며 <문라이트>, <히든 피겨스>에 출연한 훌륭한 배우이기도 하다. Rapsody 또한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붐뱁 래퍼로, 'Pay Up'이 수록된 앨범 [Laila's Wisdom]에서 'Laila'는 랩소디의 할머니의 이름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영지를 보며 랩소디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Princess Nokia의 'Tomboy'에서는 "my little titties and my phat belly"라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이를 통해 일관적 미의 기준을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 자신의 신체를 긍정한다. 그는 'Smart Girl Club'이라는 팟캐스트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래퍼 중 한 명인 Cardi B의 'Bodak Yellow'는 Lawryn Hill 이후 20년 만에 여성 래퍼로서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곡이다. 2018년 빌보드 연간 싱글 차트 Top 100 중 8곡에 참여했을 정도로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며 새로운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3. 아무리 요즘은 컨셉이 중요하다고 해도, 힙합은 기본적으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장르다. 위에서 소개한 자넬 모네의 경우만 봐도 그의 정체성과 그의 음악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여러 정체성 중에서도 래퍼들이 흔히 가장 강조하는 것은 지역적 정체성이다. 각자의 문화권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래퍼들이 존재하며, 여기에서 '래퍼'는 '여성 래퍼'로 대체할 수 있다.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싱글 2위에 오른 'Paper Planes'를 부른 M.I.A는 스리랑카 타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리랑카 내전을 겪고 인도를 거쳐 영국에 정착한 그는 음악을 통해 난민 문제, 인권 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Bad Girls' 뮤직비디오는 지금 봐도 너무 세련됐다. 인도 출신인 Raja Kumari의 'SHOOK'와 베트남에서 활동 중인 Suboi의 'N-SAO?'는 힙합 장르의 문법 안에서 지역적 정체성을 개성으로 만들어낸다. 한일 혼혈인 Chanmina는 'I'm a Pop'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모두 사용하며, "나는 팝이고, 락이고, 힙합이야"라는 가사를 통해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한다. 퀴어 논바이너리 필리핀계 여성으로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래퍼에 대한 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KIMMORTAL은 'I'M BLUE'를 통해 힙합 음악에 대한 편견을 부순다.
4. 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면서 새삼 느낀 것은 세상에는 여성 래퍼가 정말 너무나도 많다는 점이다. (이 리스트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수많은 래퍼들이 있는 만큼 그들의 음악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일본의 프로젝트 걸그룹 E-Girls의 힙합 유닛인 スダンナユズユリー의 'Look At Me Now'와 최근 하이라이트 레코즈 입단을 발표한 스월비의 'Red-Lite'는 뮤직비디오의 화려한 시각 효과와 트렌디한 랩이 인상적이다. 'Red-Lite'의 뮤비는 재키와이의 'Anarchy' 뮤비를 만들기도 한 수이 필름이 제작했다. 도쿄에서 뮤비를 촬영한 LAVA LA RUE의 'WIDDIT'은 m-flo의 'Miss You'를 샘플링했는데, 런던 출신 래퍼가 일본의 재즈힙합에 대한 애정을 음악에 녹여냈다는 점이 흥미롭다. Jclef와 Noname는 작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해외 힙합 앨범을 낸 래퍼들이다. Jclef의 '지구 멸망 한 시간 전'과 Noname의 'Blaxploitation'은 처음 들었을 때 '이런 힙합도 가능하구나'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감각의 힙합 음악을 원하는 이들에게 Jclef의 [flaw, flaw]와 Noname의 [Room 25] 앨범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