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그리고 첫 해고 (3/4)
살다 보면 참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많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한 게 아닌데,
내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된다던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누명을 쓴다던지
주말을 앞두고 새 장비를 들여왔다. 내가 정리를 담당했었고 그래서 스노보드나 스키의 무늬, 디자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새장비가 들어오면 렌탈샵의 이름을 겉표면에 프린팅하지만, 다음날이 주말이라 바로 거치대에 정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주말이 됐다. ‘고객관리’를 잘했던 사장님답게 손님들은 넘쳐났고 매장만으로 응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매장과 탑차로 장비를 나눴다. 매장에서 손님을 받아 옷을 맞추고 장비에 필요한 치수를 알려주면, 스키장 근처에 올려둔 탑차로 가서 장비를 받아가도록 했다. 이 방식으로 하면, 매장에서 장비를 맞출 일이 없어 시간이 절약되고 고객 회전율이 높아지게 된다.
새벽 2시, 3시가 됐다. 오후·야간에 분출했던 장비들이 반납되기 시작한다. 반납은 분출 때와 다르게 매장, 탑차 두 곳 모두에서 받는다. 손님들이 편리한 곳에 가서 반납할 수 있게 하도록 함이다. 모든 반납이 끝나면 탑차와 매장의 장비들을 전부 모아 개수, 파손 여부 등을 확인하는 것이 절차였다.
탑차가 돌아왔고 나와 사장님, 직원들은 함께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떤 직원이 "이 스노보드 우리꺼에요?" 라고 사장님한테 물었다. 그 직원은 어제 정리할 때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을 것이고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사장님이 나한테 와서 "이거 우리꺼 맞냐"고 확인한다. 사장님도 어제 정리할 때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제 정리하면서 봤던 디자인이 기억나서 "맞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계속 확실하냐고 물어봤다. 사람이 계속 추궁을 당하니까 맞는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걸 경험했다.
혹시나 아니면 어쩌지?
어제 정리할 때 보긴 했지만,
하나하나 머리에 새겼던 것은 아니잖아.
누가 이런 일 생길 줄 알았나?
그리고 내가 확신하지 못했던 가장 큰 불안은 이거였다. 스키장 렌탈샵끼리 장비를 받아오는 곳은 비슷해서 디자인이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어제 받아온 장비를 다른 렌탈샵도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
'그 렌탈샵과 바뀐 거라면?'
나는 우리 렌탈샵 장비라고 확신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렌탈샵 장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어제 정리하면서 봤던 장비와 디자인이 똑같아서 자신 있게 '우리 겁니다!' 말했다고 치자. 주말이 지나고 정리를 시작한 렌탈샵들 중에서 '이거 우리 장비 아닌 거 같은데요? 그쪽 샵과 바뀐 거 같습니다만?'라는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디자인이 똑같고 상태가 양호하면 바뀌어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바뀌면 바뀐 대로 우리 장비인 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후에 장비가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렌탈샵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 렌탈샵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자기들 장비를 구분하는 표시를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해두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디자인만 믿고 '우리꺼!'라고 확신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없더라도 자신을 속이면서 까지 하고는 싶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혼나는 게 싫으니 그냥 우리 꺼라고 말하련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싫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으니까 별의별 생각도 다 들었다. '우리 꺼'라고 말하고는 싶은데, '아닐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렇게는 못하겠고. 다른 렌탈샵이 프린팅이라도 해두었으면 누구 건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왜 안 한 거야? 그 렌탈샵도 바빠서 프린팅을 안 했나? 아, 애초에 안 하는 렌탈샵일 수도 있겠네..
어쨌든, 내 머리는 우리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겁니다"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날 보며 사장님도 뭔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갑자기 많은 손님들 앞에서 나한테 욕설을 퍼부으며 빨리 대답하라고 다그쳤다.
별 다른 할 말이 없어서 묵묵히 듣고 있었고, 끝나갈 때쯤 나는 "우리 장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말하며 매장을 나왔다. 그리고 탑차 있던 자리로 가서 다시 확인해보고, 다른 렌탈샵도 들려서 장비들을 확인했다. 렌탈샵 사장님들한테 '새로 장비를 들여온 게 있는지', '들여왔으면 프린팅을 했는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대답은 이랬다. 새로 장비를 들여온 샵 대부분은 프린팅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프린팅을 하지 않은 샵들의 장비는 우리 꺼와 디자인이 달랐다. 그 말은 아까 그 장비가 우리 것이 맞다는 말과 같다. 우리와 똑같은 디자인을 들여온 렌탈샵들은 자신들의 샵 이름을 프린팅 했으니, 우리 장비와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프린팅을 하지 않은 샵들의 장비는 우리 장비와 디자인이 다르니, 서로 바뀌었을 일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새벽 5시에 매장으로 돌아와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잤다.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됐고 일요일이라 여전히 손님들이 많았다.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을 때 사장님도 잠에서 깨어 나왔다. 사장님은 어제 감정선이 계속 연결되었나 보다. 나한테 여태까지 했던 것과는 다르게 명령조로 '어제 어떻게 되었냐'라고 물어봤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쳐다봤다. '대답해'라고 화를 낸다. 계속 쳐다봤다. 인간의 감이란 게, 참 신기하기도 하지. 사장님의 표정을 보니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걸 느꼈다. 이제는 '어제 일'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늦게까지 샵들을 돌아다니며 찾은 답이 궁금한 게 아니다. 다른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사장님의 표정과 말투에서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내 입으로 먼저, 말하기는 싫었다. 내가 먼저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장님이 먼저 침묵을 깼다.
"일하기 싫냐"고 물어본다.
“예”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만 둬"라고 말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싸고 나왔다. 직원들이 말린다. 참으라고 말하는 직원도 있었고, 잘못했다고 빌라는 직원도 있다. 글쎄. 솔직히 '어제 일' 때문에 충동적으로 그만두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전부터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장이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을 바꾸거나, 아니면 내가 그 모습을 받아들이던가. 그렇지 않으면 우린 같이 갈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그게 내가 살면서 처음 스스로 일을 관둬본 경험이었다.
돌이켜 보면, 장비 때문에 이렇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장비가 아닌 것을 반납 받은 것이라면, 잘 보관했다가 추후에 장비를 찾는 렌탈샵에 넘겨주면 된다. 바쁜 성수기에는 샵끼리 장비가 섞이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잘잘못을 따지자면 탑차에서 반납을 잘못받은 직원의 실수다. 매장에서 손님을 응대하던 내가 무슨 수로 탑차 반납까지 확인하는가. 또. 우리 장비가 맞다면? 우리 게 맞을 수도 있는데 사장은 무슨 확신을 가지고 욕설을 퍼부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필터링 되니까 장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미세하게 금이 갔던 관계가 지금와서 와장창 깨졌을 뿐이다.
눈은 싫다. 순식간에 기억이 되살아나니까
스스로 '그만하겠다'라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었고 세상 물정도 몰랐다. 그래서 걱정됐다. 혹시 관두는 게 습관 되지는 않을까,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는 않을까, '내 생각이 무조건 옳아!' 여기는 고집쟁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물론 지금도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잡아줘야 한다’는 나의 가치관이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바뀌는 것도 있더라. 그동안 여러 곳에서 팀원으로 몸도 담가보고 우두머리 역할도 몇 번 해보면서 조직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조직에 속해있다면 조직이 우선이고, 자신의 방향성을 조직의 목표와 일치시켜야 한다. 문제를 발견했다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고쳐서 조직이 발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도 함께 성장한다. 포기하면 조직도, 나도 제자리일 뿐이다.
조직은 조직인 이유가 있다. 개개인의 의견이나 가치관을 일일이 존중해준다면, 그 조직은 방향성을 잃는다. 명확한 목표 아래 조직이 만들어지고, 필요한 인재들이 모여야 한다. 그게 올바른 순서다. 인재들을 모아놓고 목표를 설정하려 하면, 배는 산으로 간다. 혹여 우연히 엉뚱한 방향성을 지닌 사람이 들어왔다면, 그 사람은 조직의 방향성에 일치하도록 스스로를 바꿔야 한다.
스키장 바닥에 쌓이는 눈처럼,
한 살 한 살 나이가 쌓인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현실과 타협할까, 곧 죽어도 내 신념을 지킬까.
아니면 서로 맞춰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