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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Apr 16. 2023

-스러움

내가 사는 제주도

내가 사는 제주도는 조용하다. 번화가도 아니고 바닷가도 아니다. 주변에 학교가 몇 있고 제주도에선 흔치 않은 아파트 단지도 있다. 우리 집 창문에선 앞 빌라만이 보이고, 집을 나서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다. 지대는 높은 편이라 눈이 오면 고립이 되기 일쑤. 제주도는 왜 대체 제설을 안 하는지 의문이지만 이게 여기 사는 방식이겠거니 이내 포기하고 집에 가만히 있는 쪽을 택한다. 조금만 가면 대학교도 있고 관공서도 모여있다. 꽤나 쾌적한 동네라고 할 수 있다.(제주도는 웬만하면 다 쾌적한 건가.)


초반 몇 달은 이 쾌적하고 조용한 동네가 무서웠다. 밤만 되면 도시는 어둠이라는 이불을 두껍게 덮었다. 가족단위가 많이 사는 덕에 밤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밤의 고요가 두려웠고 나 혼자만이 외롭게 이곳에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인간은 야속할 정도로 적응의 동물이라 이 동네 특유의 정적과 고요함에 금세 젖어 들어 버렸다. 동네 곳곳으로 뻗은 큰길과 골목길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고, 상점들을 밝히는 조명의 온도와 위치들이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동네뿐만 아니라 앞 동네 뒤 동네의 지리도 점차 외우기 시작하고 남들이 이야기하면 ‘아- 거기’ 할 줄 아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이 동네가 피상적 수준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 ‘아- 꽤나 괜찮군’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요가를 다니기 시작한 얼마 전부터다. 테니스를 몇 달 다니다가 발목과 무릎 문제로 잠시 쉬다가 이대로는 몸이 찌뿌둥하여 안 될 성싶어 요가 학원을 바로 등록하였다. 우리 동네 요가 학원은 이전 육지에서 다니던 요가 학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여성스러운 탑과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자 선생님들로 구성되었던 육지의 요가학원과 달리 응접실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계시던 중년의 여자 원장님이 나를 맞이해 준다. 이곳 선생님들은 모두 통은 벙벙하되 발목이 조여지는 요가용 하렘팬츠를 입고 있다. 수련원 가운데에는 달 모양의 조명이 은은하게 반사되고 있고, 스피커에서는 무인양품 혹은 동남아 리조트에서 들어봤을 법한 에스닉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육지의 요가 학원은 수강생들을 유치하고 또 회원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쓴다. 나 같은 사람에겐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영업용 미소에 오늘은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하며 결국 수련인지 벌 서기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도심 속으로 토해내 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의 요가 원장님은 내가 한 번을 오든 수강권 횟수를 넘어서 오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수련 시간도 꽤나 긴데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스무스하게 수업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다. 나는 다른 곳도 아닌 우리 동네 요가 학원에서 내가 제주도에 살면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제주도스러움을 비로소 찾은 것이다.


요가 학원의 연장선으로 제주도 가게들은 웬만하면 치열하게 영업할 생각이 없다. 일요일에는 문을 안 여는 것은 기본이고 점심 장사까지가 끝인 맛집들이 많다. 이 정도로만 영업을 해도 문제가 없는 건가 심히 궁금해지면서 처음에는 이런 치열하지 못한 제주도 요식업계에 불만을 가졌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일요일 장은 미리 봐두고, 점심 장사만 하는 맛집은 시간이 날 때 꼭 찾아가 봐야지 하는 삶의 소소한 행복으로 자리 잡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매일 같이 배출하며 도로를 채우던 복잡한 육지의 도시들을 생각하면 이런 쪽이 훨씬 쾌적하고 아름다운 방향이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이제는 제주도의 고요함, 적막함, 느림과 공백에 차츰차츰 스며들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다시 도시로 돌아갔을 때의 나는 또 어떤 형태로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갈 것인지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찾아온다. 너무 뒤처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도시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제주도가 지닌 공백과 쾌적함이 너무 그리워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걱정을 가불로 당겨서 해버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24시간 힘을 주고 있는 것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에 오늘도 미간에 힘을 풀지 못한 채, 흐린 하늘의 제주도 풍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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