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일홈 Aug 03. 2023

파도 0m에서 패들보드 타기

제주에서, 서른.

요즘은 모든 게 참 평화롭다. 제주가 주는 환경적 특성도 있을 것이고, 여름이 주는 특유의 붕 뜬 분위기와 업무적 안정기가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기인 듯하다. 배부른 소리일지, 이러한 평화가 되려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느낌이다. 한여름의 제주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곳이었지만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 제주의 한여름을 맞이한다는 것은 과거의 내가 느끼던 제주에 대한 감동을 반감 혹은 반의 반의 반...감시키는 일이었다. 태풍 수준의 강풍이 부는 이호테우 바다에서도 까르르 까르르 거리며 놀던 소녀들과 온몸에 펌핑을 잔뜩 먹이고 온 헬스 청년들의 물놀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저 뒷짐 지고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노인이 된 기분인 것이다.


나는 사실 여름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다. 여름의 바다, 물놀이, 신나 있는 혹은 축 늘어진 사람들, 뜨거운 태양이 주는 반강제적 무기력감, 맥주, 음악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찾은 '이 세상을 살아갈만한 몇 안 되는 명확한 이유'였다. 이번 여름은 특히 새로운 여름의 도전들도 꽤나 있었다. 인생 첫 제주 게스트하우스, 제대로 설 줄 아는 서핑, 스쿠버 다이빙 등. 제주도에서만(혹은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들로 제주살이의 골수까지 뽑아먹어 보겠다는 심보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주말이 기다려지질 않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나는 김포공항에서 책 한 권, 비키니 한 벌 챙겨 들고 와 곽지해수욕장에서 혼자 비치타월을 펼쳐놓고 책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극치를 느끼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여름, 제주, 여름의 제주와 제주의 여름을 사랑한다. 남들은 싫어하는 정오의 태양도, 짜고 습기 찬 바다 바람도, 염소 혹은 짠물에 절여져 아무리 트리트먼트를 해도 부스스한 머릿결까지 사랑한다. 그런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기력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종종 동남아시아나 괌 같은 휴양지 도시를 놀러 가면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떨까, 행복하기만 할까, 아니 1년 365일은 좀 그렇지 하는 생각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30대의 나에겐 커리어에 대한 고민, 회사 내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나의 파트너와의 미래에 대한 고민, 가족들에 대한 고민들이 끊임없이 내 주변을 맴돌고 있지만, 제주에선 그런 고민들이 마치 불필요한 사치품 같다. 점점 과거에는 관심도 없던 작고 아름다운 보석이 내 눈길을 사로잡고, 결혼을 하고 집과 차 그리고 아이도 가진 친구들을 보며 마음이 심란해지는데, 제주 속의 나는 그 모든 것들과는 분리된 삶을 사는 기분이다. 제주에 오기 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 현재의 나는 서핑 실력이나 수영 실력 상승했을지 몰라도, 라이프사이클적으로는 제자리인 기분, 파도를 오르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파도  0m의 바다에서 패들보드만 유유하게 타고 있는 기분인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가서 이 모든 것들은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나는 사실 지금 어느 정도 행복하고, 다시 어떤 혼돈에 뛰어들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이대로 쭉 흘러도 되는 걸까 싶은 진지하고도 심각한 고민은 떨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유영하는 시간에 온 힘을 다해, 아니 온몸에 힘을 풀고 몸을 맡기는 수밖엔, 아직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러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