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6.
우리는 반드시 경험하는 것에만 공감할 수 있을까? 세상에 ‘나는 너를 공감할 수 없어.’라는 말만큼 서운하고 상처가 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공감할 수 없다고 느끼고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경험하지 않는 것에도 공감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경험하지 않을 수 있던 내 사정에는 경험해야만 했던 타인의 사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개별적인 개인이 개인적 체험이라고 생각하는 경험 속에는 가까운 타인과 무수히 많은 타인들, 특정되지 않는 사회적인 어떤 것들이 뒤 엉켜 있다. 그런 점에서 경험은 개별적인 개인이 체험한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내 시간과 공간은 제약을 가지고 있어서 경험 없이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임이 확실하다. 내가 체감하는 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의식과 사유를 필요로 하고, 타인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불특정 한 비용을 낸다. 나이가 들 수록 나의 경험이 두터워질수록 가까운 이들의 나와는 다른 삶의 경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의 무수한 영향 아래 있는 나는 K-장녀의 효 사상과 이성애적 부부 역할의 압력 아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고부갈등이나 양육 압박에서는 자유롭다. 최근에 고부갈등에 대해서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 공감이 부족하지 않았나? 내 이해가 얕지는 않았나?‘ 고민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은 다소 명확하지만, 현실에서의 마주침은 얽히고설켜서 들여다보기도 힘들고 공감하기도 힘들 때가 있다. 이건 분명 자아 설정과도 연결된 문제다. 경험을 통해 소통할 수도 있지만 경험의 유무에 따라서 벽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스스로의 자아를 분할한다. 고부갈등을 경험한 여성, 아이가 없는 여성, 양육 스트레스에 지친 여성, 중산층인 여성, 전업주부인 여성, 일하는 여성, 고학력자인 여성 등등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각자의 연결성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만들어 낸다. 이건 분명 외롭고 답답한 일이다. 하지만 경험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때때로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들을 마주하며,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에 균열을 내는 수많은 ‘나‘를 만들어내는 영웅 같은 사람들. 현실의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 때문에 화가 나지만 누구를 향해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척하면 척 알아듣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같이 싸워주는(은유, 해방의 밤, 318p) 사람들과 내공을 쌓아가며 견딜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딱 떨어지는 명쾌한 해답이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혼란스러운 서로를 들여다봐주는 삶의 시간, 공간, 관계와 같은 비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