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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심소녀단 Jun 09. 2020

맛있게 비린 맛, 그리운 바다의 맛

작은 항구 마을 가족의 밥상을 지킨 은빛 ‘멸치’ 이야기

            


1. 문득 깻잎쌈과 멸치젓갈 장이 떠오른 건 어느 해 여름 뜨거운 오후였다      


여름이라고 딱히 입맛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그게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즐기는 음식도 아니었다. 깻잎을 씻어 데치고 멸치젓갈을 종지에 퍼 담는 할머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게 더 정확할까? 어느 해 여름이었는지, 그 많던 식구들은 다 어디 가고 할머니와 단둘이 점심을 먹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할머니 살아계시던 시절의 고향 집 부엌과 점심을 준비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 여름 어느 날, 점심 밥상에 올라온 것은 아침 먹고 남은 찬밥과 슬쩍 데쳐서 찬물에 헹군 뒤 손으로 꼭 쥐어 물기를 짜낸 깻잎쌈, 덜 삭은 뼈에 은빛 비늘만 조금 남은 멸치젓갈을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멸치젓갈 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만 할 수 있던 반찬 투정을 하며 꼬막손으로 깻잎쌈을 싸던 어린 내가 있었다.     


살짝 데쳐져 색과 향이 더 짙어진 초록 깻잎을 두어 장 손바닥에 잘 펼친 뒤, 찬밥 한 숟가락을 올리고 숟가락 끝을 멸치젓갈 장에 담그듯이 퍼서 흰 밥에 묻힌다. 소꿉장난을 하듯 요리조리 접은 동그란 쌈을 입안에 쏙 넣으면, 먼저 여름 열기에 향이 더욱 독해진 깻잎이 쌉쌀하게 퍼지고 짭조름하고 비릿한 멸치젓갈 장이 입안 가득 차오른다. 


멸치젓갈 특유의 비리고 짠맛에 몸서리를 칠 때쯤이면 다시 알싸한 깻잎 향이 퍼지고 구수한 흰 밥 냄새가 섞인다. 몇 번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면 얼른 다음 깻잎을 손바닥에 펴기 시작하고 다시 밥을 올린다. 입맛 없다고 하시던 할머니도, 맛없는 것만 해준다고 투덜거리던 어린 손녀도 손이 바빠진다.    

  

그 맛이다. 여름의 맛, 고향 바다의 맛, 그리운 내 할머니의 맛...


유년의 기억과 그리움 속에 그렇게 갑자기 떠오른 할머니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맛을 강렬하게 불러일으켰다.      


마트로 바로 달려가 깻잎을 샀다. 깻잎이야말로 사계절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서민의 대표 음식 아니던가. 하지만 멸치젓갈 장은 도대체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흔한 멸치액젓도 없는 단출한 냉장고에서 겨우 된장과 고추장을 찾아 간단한 쌈장을 만들고 얼려둔 밥 한 그릇을 꺼내 밥상을 차렸다. 허겁지겁 깻잎쌈을 싸서 입에 넣고 씹었다. 그 맛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 맛일 리가 없었다.             

  



2. 동시대를 살았다면 아마도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1908년생 바닷가 여인     


할머니는 바닷가 토박이로 평생을 살다 가셨다. 고기보다 생선을, 생선보다 해초와 채소 요리를 더 즐겼던 할머니는 돌아가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같은 바다를 곁에 두었고, 마지막엔 그 바다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고향이자 내 고향인 그곳,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본 바다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과 많이 달랐다.   

   

울산 장생포와 이어지는 작은 어촌이었던 고향 마을은 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고래잡이가 성했고 고래잡이와 관련된 2차 상권이 발달했던 곳이다. 다른 어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했다. 그러나 고래로 유명했던 동남쪽의 항구 도시 울산은 60년대 후반 들어 자동차 공장이 들어오면서 급속하게 달라졌고, 1973년 고향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조선소는 고향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자리가 생겼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작은 항구 마을에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남녀 할 것 없이 새로 생긴 공장으로 일하러 갔고, 아이들만 남은 집에서 엄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며 밥상을 차린 건 할머니들이었다. 일하는 여성의 육아와 가사노동 문제를 사회가 외면하던 그 시절, 엄마의 가사노동을 기꺼이 나누었던 할머니는 손주를 돌보고 가정을 지키는데 당신의 남은 삶을 바쳤다.    

       

할머니는 4남매를 번갈아 등에 업고 매일 좁은 부엌에 쪼그려 앉아 밥을 지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4남매의 도시락을 싸준 것도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바다에서 난 것들을 육지에서 난 것들과 조합해 계절마다 환상적인 집밥을 만들어냈다.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고 목소리 높일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의 손맛 덕분이었다.   

   

겨우내 장독에 묻어둔 까맣고 쫄깃 짭짤한 미역 줄기 장아찌, 살짝 데친 곰피에 삶은 콩나물을 넣고 된장에 무친 곰피 나물, 살만 발라 넣은 꽁치와 어슷 빗어 넣은 무로 끓여낸 칼칼하고 뜨거운 꽁칫국, 가늘게 찢어 넣은 멸치가 씹히는 산초 향 가득한 시락국 등 바닷가 토박이였던 할머니의 레시피로 차린 밥상엔 늘 고향 바다가 넘실거렸다.      


짜장면이나 치킨, 가족 외식 때나 먹던 언양 불고기가 더 좋았던 유년 시절의 내가 먹어본 적 없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맛의 음식들이 매일 세 번 가족의 밥상에 올랐다.


그땐 몰랐다. 이토록 오래 할머니의 맛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게 될지를...      

       

고향 마을 항구 전경. 최근 연안에서 멸치가 많이 잡혀 남해의 멸칫배가 몰려 들었다.


3. 유년 시절 고향 집 건너편에는 생선을 사고파는 구판장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구판장을 ‘판장’이라고 불렀다. 1985년 포경(고래잡이)이 금지되기 전에는 학교에서 돌아와 판장에 놀러 가면 죽어있는 작은 밍크고래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작다고 해도 길이가 2~3m나 되었다) 시장엔 고래고기를 파는 노점이 늘 벌어졌고, 동네마다 빨간 대야를 이고 다니며 고래고기를 파는 아주머니들도 흔했다.     


고래고기는 노린내가 특히 심해서 고래고기 가게를 지날 때면 숨을 참고 뛰어가야 했다. 그 시절 고래고기는 대표적인 어른들의 음식이었다. 가끔 신문지에 둘둘 말려 부엌 찬장에 놓여 있었는데, 고래고기를 먹을 줄 몰랐던 어린 나는 어른들이 맛있게 먹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은 고래를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출어 나갔던 배들이 돌아올 때면 판장은 북적였고 활기가 넘쳤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멸치잡이 배였다. 지금은 멸치를 잡자마자 배에서 신선도를 유지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예전엔 그물 가득 멸치를 싣고 돌아와 선착장에서 바로 멸치를 털었고 즉석에서 한 바구니에 500원, 1000원씩 팔기도 했다. 멸치잡이 배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바구니를 들고 판장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4남매도 할머니를 따라 나가곤 했다.

     

어느 봄, 해 질 녘 판장의 풍경은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멸치를 볼 때면 그 순간이 떠오르고 비릿한 멸치 냄새가 마음을 흔든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고 노란 백열등 불빛이 켜지면 선착장 귀퉁이에서 큰 비닐 앞치마를 두른 어부들이 나란히 서서 추임새를 넣으며 그물을 털었다. 어이 챠 어이 챠~ 그물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은빛 멸치가 튀어 올랐다.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반짝거리며 솟구쳤다 떨어지는 은빛 멸치 떼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무척 아름다웠다.  

    

어느새 추임새는 어부들의 합창으로 이어지고 멸치들이 은빛 군무를 추기 시작한다. 비로소 때가 됐다. 이제 바구니를 들고 기다려온 사람들의 시간이다. 그물을 벗어나 탈출한 멸치들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의 바구니는 그득해진다. 떨어진 멸치를 줍는 사람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그물에 부딪힌 멸치의 비늘이며 내장이 어부들의 앞치마와 멸치 줍는 사람들의 몸을 뒤덮는다. 새벽부터 고생하며 잡아 온 멸치를 공짜로 주워간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눈치 보는 사람도 없다. 바다만큼 넓은 바닷가 사람들의 인심이 짧은 시간 그곳에 넘칠 뿐이다.  

             

항구에서 가자미를 말리는 모습(왼쪽) 동네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인다.(오른쪽)



4. 좁은 방 작은 상에 일곱 식구가 둘러앉아 뜨겁게 나눠 먹은 멸치 김치죽          


멸치는 할머니의 손을 거쳐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살아있는 것부터 삭은 것까지 온갖 요리로 만들어졌다.


갓 잡은 가장 신선한 멸치는 연탄불에 통째로 구워져 할아버지의 소주 안주가 되었고, 채소와 빨간 양념에 버무린 멸치회 무침이 되어 밥상에 올랐다. 또 생멸치 중 큰 놈은 말려놓은 배추 시래기에 된장을 넣고 끓여 밥상 한가운데에 놓였다.      


할머니는 찌개에 들어간 큰 멸치를 잘 못 먹는 손녀를 위해 멸치 맛이 잔뜩 밴 배추를 손으로 쭉쭉 찢어 밥 위에 올려주셨다. 멸치 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싱싱한 생멸치가 배추, 된장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감칠맛은 어디 비할 데가 없다. 비린내를 애써 감추기보다 맛있는 비린 맛을 내는 것, 진짜 바다의 맛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생멸치로 끓인 시래기찌개만큼이나 할머니가 자주 만들어주었던 음식은 ‘멸치 김치죽’이었다. 김장 김치가 시큼하게 익어가고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할머니의 김치죽이 등장할 때다.   

  

마른 멸치를 듬뿍 넣어 진한 육수를 내고 신 김치를 쏭쏭 썰어 넣어 한소끔 끓인 뒤 찬밥과 국수를 넣고 약한 불에 오래 저어가며 끓인다. 멸치 살이 풀어지며 섞이고 김치가 부드럽게 씹힐 정도가 되면 밥은 죽이 되고 국수는 짤막해진 채 겨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면 완성이다. 밥상에 앉은 식구마다 뜨겁게 담아낸 김치죽을 한 그릇씩 받아 들고,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뜨거운 김이 빠지기 시작하면 숟가락질은 더욱 바빠지고, 그릇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면 서둘러 한 그릇씩 더 받아 든다.   

   

뜨거울 땐 매콤한 김치와 구수한 밥맛이 강하지만 식을수록 멸치 맛과 국수 특유의 밀가루 맛이 올라온다. 멸치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특유의 비릿한 감칠맛을,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김칫국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선사하고 밥을 좋아하는 사람과 국수를 좋아하는 사람 모두를 끌어안는 맛이라고 할까. 싱싱한 식재료가 부족한 겨울날, 부엌에 있는 재료만으로 뚝딱 만들 수 있으며, 추운 날씨에 한 그릇 먹으면 언 몸을 녹이고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음식이 바로 ‘멸치 김치죽’이었다.   

   

판장 건너편에 살던 유년 시절의 겨울엔 할머니표 김치죽을 자주 먹곤 했다. 작은 집, 작은 부엌, 작은 방에 검은 머리 할머니와 젊은 부모, 아직 어린 4남매가 작은 상에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김치죽을 먹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족의 밥상에서 서둘러 사라진 음식 또한 김치죽이었다.


집이 커지고, 먹을 것이 많아지면서 할머니는 더 이상 김치죽을 끓이지 않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식구들이 한 명씩 집을 떠나면서 가족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은빛 멸치를 춤추게 했던 어부들을 대신해 멸치 공장이 생겼고 멸치 줍던 사람들도 영원히 사라졌다.      


그리고 일하느라 바빴던 엄마가 부엌으로 돌아오면서 어느새 머리가 하얗고 등이 많이 굽은 할머니는 부엌일에서 손을 놓으셨다.


울산 토박이였던 할머니가 만들었던 바다와 육지의 다양한 퓨전 음식은 가족의 밥상에서부터 하나씩 잊혔고, 성장하기 바빴던 공업 도시 울산은 유입된 외지인들의 음식이 섞이면서 고유의 음식문화를 잃어버린 도시로 서서히 변해갔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처럼 흰머리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할머니의 손맛이 담긴 생멸치 시래기찌개와 풋 호박을 썰어 넣은 수제비를 지금도 그리워하신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할 때면 멸치 주우러 갔다가 바다에 빠진 어린 오빠와 오빠를 구해준 어부에게 됫병 소주와 옷을 선물했던 오래된 이야기도 들려주신다. 그때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오빠는 그 날 이후 멸치잡이 배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며 남은 얘기를 전했다.

  

오션뷰 아파트들이 바꿔버린 항구의 스카이라인


             

5.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거 기억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어 간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눈을 감은 그 방에서 장례를 치렀다. 부엌에선 손님들을 맞기 위해 멸치로 우려낸 칼칼한 꽁칫국 큰 솥에서 끓고 있었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을 뚫고 조문 온 손님들은 뜨거운 꽁칫국 한 그릇의 온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나의 마지막 꽁칫국이었다.


가끔 할머니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그 옛날처럼 할머니를 부르고 할머니를 쫓아다닌다. 할머니가 꿈에 나타난 뒤에는 어김없이 할머니의 집밥이 떠오르고 맛있게 비릿한 바다 맛 가득한 음식들이 생각난다. 살아오면서 다른 곳에서 다른 이의 솜씨로 맛본 음식들도 있었지만 할머니의 맛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고향을 떠나온 뒤로 다시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할머니의 손맛을 흉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솜씨 없는 나는 할머니의 음식이 너무 그리울 때면 가족을 붙잡고 물어본다.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거 기억나?”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는 저마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그 시절의 기억도 다르다. 할머니의 음식에 대한 나의 기억과 가족들의 기억이 섞이면서 새로운 기억이 나타나고, 낯선 기억이 더해져 더 온전한 기억이 되고, 할머니의 맛을 떠올렸던 그 순간도 어느새 또 하나의 추억이 되어간다.     


그 시절 그 맛을 떠올리며 실컷 떠들고 나면 배가 고파진다. 어떤 것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을 허기라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 안타까운 것도 아니다. 그저 많이 그리울 따름이다.  

    

대신 더 생생하게 떠올리고 더 세세하게 기억하려고 한다. 그리고 기록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단어와 최상의 문장으로, 미처 못다 한 말들과 내 모든 사랑을 가득 담아서.


우리 엄마의 멸치 그림과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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