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시작해서 시끌벅적하게 끝난 하루
아이들이 벌써 태어난 지 500일이다.
여느 날과 같은 평일이었고, 엄마가 오전에 볼 일이 있으시다고 했다. 둘째와 같이 느지막이 10시경 일어난 나는 별 계획 없이 아이들을 보고 있었는데, 준비를 마치신 엄마가 “한 명 데리고 갔다 올까?” 하셨다. “그래 주면 좋지, 어제 첫째는 외출 못했으니까.” 로 시작해 부지런히 첫째의 외출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위아래 내복을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그 위에 넉넉한 사이즈의 후리스를 입힌 뒤 겉옷을 입혔다. 첫째가 준비하는 걸 보더니 둘째도 쳐다보고 있긴 했지만, 내가 옆에 있어서인지 징징대거나 하진 않았다. 첫째와 엄마가 나가고 둘째와 남게 되었다.
오늘은 뭐하고 놀아주지? 하고 생각해보니 하루가 너무 많이 남았다. 다른 어른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욕실 문을 열어놓고 잠시 아이패드를 보여주고 샤워를 시작했다. 역시나 영상 보는 것도 잠시였다. 화장실 앞에 와선 (욕실 수증기 때문에) 어렴풋이 보이는 엄마를 보며 잉잉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자마자 대강 트리트먼트만 설렁설렁 묻혀서 헹구고 나와버렸다. 문을 열고 하는 샤워도 좀 그렇고 우는 애를 그냥 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부리나케 옷을 입고 화장은 대충 찍어 바르고 머리는 뿌리만 말린 채로 아이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위아래 내복을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똑같은 후리스를 입히고 겉옷을 입혔다.
도서관에 책 한 권을 반납하러 갈 계획이었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린데, 2:50분쯤 나와서 잠든 걸 확인하니 3시경이었다. 낮잠 시간을 노려 나오긴 했지만, 너무 일찍 잠들어 버린 둘째. 고맙기도 해라. 부담 없이 (시끄럽게 할 일이 없으므로) 도서관에 들어가 2층 서가를 돌다가 아무튼 시리즈를 발견했다. 아무튼 메모, 아무튼 아이돌, 아무튼 피아노 시리즈를 집어 들었는데, 먼저 읽기 시작한 건 저자 이름이 낯이 잊은 정혜윤 작가(‘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애지중지해가며 읽었었다)의 아무튼, 메모’였다. 아이가 옆 유모차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으니 살짝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것도 공공도서관에서 잠든 아이라니!
책도 읽다가 인스타 스토리 업로드도 좀 하다가 내년 미국 프리스쿨에서 온 메일 답장도 좀 하다가 금세 1시간이 지났나 보다. 아이가 움찔할 때마다 내 마음도 갈팡질팡했다. 이대로 책을 빌려 나갈까, 아이가 완전히 깰 때까지 내 시간을 만끽할까. 움직임이 잦아져서 불안한 마음에 일단 책을 대여해놓고 다시 보기 시작했다. 새근새근 볼이 발개진 채로 잘 자던 아이는 아니나 다를까 이내 눈을 떴다. 갓 잠에서 깬 힘이 빠진 나른한 얼굴은 그것대로 너무 귀여웠다. 얼른 도서관을 나와 옆 건물 스타필드로 들어갔다. 몰 입구 문앞에서 낑낑대고 있으니 “제가 잡아드릴게요” 하며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셨다.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채 감사하다고 두번 넙죽 절하며 몰로 들어갔다. 스타필드에 갈 때마다 유모차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잡아주시는 도움을 받곤 하는데 추운 날씨에 받은 그런 작은 도움은 대체로 더 감사하다.
부쩍 추워진 날씨가 걱정돼 MUJI 매장에 들러 아이들 벙어리장갑을 먼저 골랐다. 또 스낵 코너로 가 아이들 줄 만한 과자 몇 가지를 주섬주섬 골랐다. 뭔가 조용해서 유모차를 보니 아이는 다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 이런 날도 있구나. 나는 신이 나서 집에 가서 먹을 저녁도 테이크 아웃하고 아이들 500일 기념으로 친정엄마와 먹을 케익도 한조각 샀다. 이때만 해도 뭐 기념사진 찍을 생각을 한건 아니었다. 집에 가보니 첫째도 신이 나서 할머니와 놀고 있었고, 때마침 둘째도 2시간의 외출(아이 입장에서는 낮잠)에서 돌아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부지런히 저녁을 먹이고 미국에서 가져온 아이들 드레스를 찾았다. My Little Posh라는 브랜드에서 산 300일 기념사진 때 입은 옷을 입히니 꼭 맞았다. 200일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컸는지 새삼 느껴졌다. 요즘 핀을 꽂으면 바로 빼버리는 아이들 때문에 핀은 힘들겠고, 잠깐씩이라도 하던 머리띠도 절대 안 할 것 같았다. 아웅다웅하며 첫째부터 옷을 입히고, 레이스 양말과 아이가 좋아하는 신발을 신겼다. 일단 머리는 두고 둘째 옷을 재빠르게 입혔다. 같은 레이스 양말이 없어 컬러만 동일하게 핑크로 매치해줬다. 사진에는 잘 안 보이지만 헤어 고무줄도 핑크로 맞춰 재빨리 양갈래 머리를 해줬다. 혼자서는 절대 못 찍을 기념일 사진 촬영. 엄마가 앞에서 먼저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 깡~총!” 해주시기 시작했다. 이때 빨리 테이블에 애들이 요즘 잘 갖고 노는 장난감을 대강 배치하기 시작했다. 양 사이드에 키가 높은 장난감과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배치하고, 센터에는 컬러감이 예쁜 장난감을 놓았다. 꾸미는데 아이들이 징징대면 소파에서 내려오지 않게 하려고 튤립 장난감도 쥐어주고 과자도 쥐어주고 해서 서 있게 했다.
엄마랑 나랑 산토끼 노래를 듀엣으로 불러가며 시선을 모았다. 잊지 않고 동영상을 찍어뒀는데 당시 아이들의 신남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고, 엄마와 나의 정신없음이 너무 생생하다. 사실 아이 둘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신 친정 엄만데, 동요 부르랴 애들 옷 갈아입히고 시선 모으랴 괜한 노동을 시킨 것 같았다. 즉흥적인 기념사진 촬영이었고, 준비한 건 조각케익 하나밖에 없는데 애들이 너무 신나 했다. 나의 엄마의 힘듦보다 나의 아이들의 기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란 말이 나오는 건가 보다, 생각했다. 새삼 자식의 100일, 200일, 300일, 돌잔치, 500일을 챙겨주고 있는 나의 유난스러움이 멋쩍었다. 친정엄마는 나만큼 이벤트풀하지 않으신대 나는 누굴 닮은 걸까?
둥이들이 나중에 이 사진들을 그렇게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이벤트를 좋아하는 엄마를 만난 너희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