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6개월의 기적같은 선물
아이들의 발달이 좀 느리다는 자각은 중학교 친구를 통해서였다.
8월 10일 한국 입국 후 일주일을 시댁에서 보낸 뒤 친정에 왔다. 거의 1년 만에 보는 친정 엄마였고, 1년 반 만에 보는 아빠였다. 뒤이어 3년 만에 보는 중학교 동창, 1년 반 만에 보는 고등학교 동창이 회사 휴가를 내고 둥이들을 보러 와 주었다. 그리고 곧 나보다 한 달 먼저 결혼해 벌써 아이 셋의 엄마가 되어있는 친구이자 선배맘인 친구가 다녀갔다. 친구는 13개월이 된 우리 애들을 보자마자 아이들 발이 너무 작다며 발을 만졌다. 돌이 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발바닥을 땅에 내딛으려 하지 않고 무언가를 잡고 일어서려 하는 일도 없었던 때였다. 아직 걷지 못하는 우리 애들은 기어 다니기가 아닌 엉덩이로 미끌미끌하며 이동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까진 ‘귀엽고 좀 웃기다’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쌍둥이라서 좀 느린 거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친구의 기기-걷기-말하기가 한 세트라는 말을 듣고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 같다. 쌍둥이지만 3.11, 2.76킬로의 정상 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들이고 돌 때까지 감기 한 번밖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아이들이니까 다른 것도 다 문제없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사실 두 명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하는 일만 해도 하루가 너무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었다. 둘이 마주 보고 범보 의자에 앉혀놓고 둘이 만질 수 있는 커다란 장난감 하나 놓아두면 젖병 소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돌이 가까워졌을 때쯤 보행기 두 개를 태워놓으면 집안일할 시간을 벌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한창 바닥에서 기어 다닐 6-7개월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범보 의자에 자주, 그리고 오래 앉혀졌다. 쌍둥이 특성상 혼자가 아닌 둘이다 보니 마주 보고 놓아주면 제법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엄마인 내 입장에서는 시간을 좀 버는 셈이었다. 아이들도 마주 볼 대상이 있어서인지 바로 칭얼대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또래 아이들보다 범보 의자를 자주 활용했던 게 독이 된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굳이 의자에 앉히지 않았더라면 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배밀이도 하고 네발기기를 할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10개월 이후였을까. 마침 물려받은 보행기가 둘이나 있어 거실 복도를 치우고 보행기 길을 만들어줬다. 둘째는 보행기를 타고 바로 다음날 적응을 해서 신나라 하며 거실과 방을 휘젓고 다녔고, 첫째는 첫 보행기 탑승 후 3일이 지난 후 그동안과 달라진 시야와 스피드를 즐기며 옷 집안을 누볐다. 그때는 귀엽고 잘한다며 박수쳐 웃고 좋아하던 내가 좀 부끄러웠다. 둘이라서 힘들어서 그랬다는 변명도 지겨웠다. 아이들마다 속도가 다 다르긴 하지만, 내 아이는 평균에 맞춰 성장하길 바라는 게 부모의 마음인 듯했다. 미안했다.
사실 아이들 100일 때부터 같이 봐주신 이모님께서도 다른 애들에 비해 유난히 터미 타임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하시기는 했었다. 지금 시기엔 분명 소파를 잡고 서려고 할 텐데 두 아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하시기도 했다. 완전히 흘려들은 건 아니었지만 매번 ‘때가 되면 다 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넘겼다. 행동 발달이 인지 발달로 연결된다는 친구의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마음이 좀 복잡해진 기분이었다. 친구가 친정엄마 집 근처의 ‘열매아동발달센터’라는 곳을 소개해주자 이 일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시의 적절하게 네발기기나 소파를 잡고 무릎 서기 등의 대근육 운동을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엄마인 내 책임인 것만 같았다.
마음이 이렇게 되자 센터에 바로 전화를 걸어 수업 예약을 잡았다. 두 아이 모두 보고 싶다고 하셔서 친정엄마와 아이 둘을 데리고 발달센터로 갔다. 다행히 센터는 스타필드보다 가까운 집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첫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기 힘들었다. 미국에서 돌 때까지 거의 아빠, 엄마, 이모님만 보고 큰 아이들이라 낯선 이에 대한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고, 선생임 말씀을 듣자 하니 둘 다 예민한 기질의 아이이기도 했다. 30분이 채 되지 못한 시간 동안 우는 애 둘을 달래다가 넷다 지쳐서 나왔다. 사실 내가 더 울고 싶었다. 죄책감과 조바심과 육아에 대한 지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엄마라는 직업은 때려치울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무력감이 들었다. 힘든 날이었다.
몇 시간 뒤 육아에 지친 한숨을 공감해 주신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선생님은 두 아이의 분리 수업을 제안해 주셨다. 좀 더 발달이 느리다고 생각한 둘째부터 먼저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첫날은 50분 수업에 반은 선생님과의 낯가림 극복의 시간이었고 고작 나머지 25분 정도의 대근육 발달 수업이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도 안 되는 수업을 얼마나 받아야 아이들이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수업을 갈 때마다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수업을 빠지지 않은 건 꾸준함의 힘을 믿는 신조와 엄마가 두 손 놓고 있지 않다는 나의 자기만족이었다. 그동안 발달 상태에 신경 써주지 못했으니 14개월인 지금, 더는 늦지 않게 간극을 메워주려는 노력이었다.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뒤처진 대근육 활동에 자극을 주고 힘을 기르는 연습을 함으로써 이후 좀 더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는 연습을 시켜주신다는 목표였다. 물론 배운 동작을 집에서 수시로 한다는 전제에서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열매발달센터는 한 달 남짓 다니게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엄마랑 아이 한 명씩 몰입도 있게 놀아주며 보낸 시간이었다. 선생님에 대한 낯가림이 사라지면 해맑은 미소로 선생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아가며 보낸 알찬 1시간이었다. 발달 센터에서 아이들이 재밌게 갖고 놀았던 장난감 몇 개를 똑같이 사 주었다. 그 장난감을 갖고 놀아줄 때마다 나도 아이들을 예뻐해 주시던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하고, 유난히 아이가 보채 엄마는 (안 보이게) 화장실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있던 수업들도 생각난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도 나는 아이들 영상을 보내면 발달 상태를 체크해 주시겠다던 선생님 말을 잊지 않고 2주에 한 번은 영상을 보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완전히 잠든 밤 11시 정도가 되어야 영상을 정리해 첫째, 둘째 나눠서 보낼 수 있었는데, 아침이면 늘 꼼꼼한 조언과 아이들 예쁘고 기특하다는 선생님 칭찬이 감사해서 나도 꾸준히 기록했던 것 같다. 혼자 했으면 더 숙제 같았을 일들이 어른 여럿이 다 도와주시니까 해낼 수 있는 팀플 과제처럼 느껴졌다. 친정 엄마는 두 발을 지면에 닿길 거부하고 살짝 높은 곳에 앉으면 내려오길 무서워하는 둘째를 위해 매일같이 저상 침대에서 내려오는 연습을 시켜주셨고, 친정 아빠는 퇴근 후 매일 첫째가 할아버지만 따라갈 정도로 두 손 잡고 걸음마 연습을 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기적처럼 찾아왔다.
막 16개월이 지난 이후였을까. 첫째가 집안 매트에서 혼자 서너 발자국을 손 놓고 혼자 걷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첫째는 곧 걷기 시작할 거 같아요, 란 말을 듣고 난 며칠 뒤였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이라서 였을까. 엄마가 유난히 환하게 웃는 모습에 신이 났던지, 칭찬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나를 보고 씨이익 웃으면서 와락 안겨들어왔다. 첫걸음마를 한 아이가 부모에게 와락 안기는 순간이라니. 기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이런 순간순간의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가 둘씩이라니... 온전한 내 시간이 없는 하루하루가 쌓여 1년이 되고, 또 1년이 지나가니 이렇게 아이의 눈에 보일만한 성장을 보게 되는 순간이 오는구나. 울컥했다.
한동안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걷는 게 꿈일 만큼 간절했던 밤도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걸음마에만 꽂혀 그날 하루 온전히 아이에게 줄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한 게 지금은 아쉽기만 하다. 아이들은 우리가 주시하지 않는 동안에도 자라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의 눈맞춤, 웃거나 울었을 때 엄마의 반응, 간식을 줄 때의 엄마의 표정, 잠들기 전 엄마의 목소리 같은 것들.. 아이는 엄마와 시시때때로 상호작용을 원하는 데 나는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만을 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바라던 것을 바라고 나니 지난 초조함이 기우였단 생각도 든다. 원래 인생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첫째도 인생의 첫걸음마를 떼었고 나도 이제 엄마가 된 지 2년 차가 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너희들과 나의 인생에 더 큰 성장이 기다리고 있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