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면, 그것들을 '애완동물'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이 늘어남을 느낀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물고기나 햄스터밖에 키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예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완동물이라는 단어에 발끈하는 몇몇 여론에 '뭘 저렇게까지 반응을 하나'하고 심드렁해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작은 설기(사진 속 개)가 우리집에 온 뒤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여러 추억을 쌓으면서, 그런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꾹꾹 담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소 진부하고 유치한 표현이지만) 같이의 가치가 무엇인지, 남들에겐 '함께 사는 동물'이 우리에겐 어떻게 '가족'이 되어가는지, 그런 커리큘럼적 과정들 역시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식용 개 문화'를 반대하는 사람들 혹은 '캣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강형욱 씨같은 사람도 아니고, 독심술사는 더더욱 아니고, 개와 함께한지도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초보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내 품에서 잠드는 설기(사진 속 개)와 장난치다 보면, 분명히 이 개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점심을 먹고 나면 졸고, 자다가 깨우면 눈이 반쯤 감겨 있고, 간지럽히면 웃고, 음식을 먹고 있으면 한 입만 달라고 보채고, 가족이 오면 반가워한다. 마치 나처럼. 아니, 마음에 더 정이 많냐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나보다 설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꼬리가 없으니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로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이 좀 부끄럽기 때문이다. 꼬리는 입보다 덜 진화된 것일 수는 있어도 '솔직함'이라는 본능에 더 가까운 신체 구조일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고 느낀다. 기쁨을 얻고, 슬픔을 느끼고, 장난이 심해지면 화가 나고, 오줌이 마려우면 급해지고, 일을 잘하면 보상을 얻길 원하는, 나와 똑같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진심으로 나라는 존재와 대등하게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없이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겠으나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사람들 속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입은 꼬리보다는 솔직하지 않은 신체 구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나와 동등한 생명'으로 인식하고 나면, 정상적인 사람의 신체 어딘가엔 일종의 책임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법치가 자리 잡힌 현대에 들어와서 살해를 저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루는 범죄가 어떠한 이유에도 존중받지 못하게 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책임감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1900년대의 전쟁, 민주화 운동으로 쟁취한 '자유'가 기존의 키워드였다면, 작은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쓰레기조차 쉽게 버리지 않는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가장 각광받아야 하고, 스스로 지켜야하는 것이 아무래도 '책임감'이 아닐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앞서 언급한 캣맘같은 사람의 마음은 역시 '어렴풋이'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본인들이 집으로 데려가 먹이를 주며 함께하면 될 일이다. 단지 편의점에서 산 먹이를 누군가의 집 앞에 줌으로써 그 아이를 살리는 일이, 그들에게는 '책임'이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하고 할말이 없어진다. 나로서는 설득이나 조언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러한 반 쪽짜리 책임은 행동들은 누군가에겐 지속적인 피해를 입힌다. 결국 언젠가는 불만이 터지게 될 것이며, 궁극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길고양이를 분양한 주인들에게 캣맘들이 보고 싶을 때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 이른바 <책임 분양>이라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대충 알아봐도 미친 문화다. 그런 것들이 반려라고 한다면 성실한 반려인들은 조금 어이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일텐데, '애완'보다는 '반려'라는 말을 써야한다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정작 '반려(伴侶)'는 '반려(反戾)'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이거는 솔직히 좀 잘못된 거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