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여행 누리
쿵, 쿵, 쿵,
신라인은 사람 키의 세 배인 5-6미터 깊이로 내려가 공이로 바닥을 다졌다. 저 소리는 신라가 마음을 다지는 소리, 백 년을 설계하는 달구질 노래다.
분주한 마음을 털어내고 빈 공간이 주는 적요에 여유를 얻고 싶을 때 나는 절을 찾는다. 그러다가 마당이 비좁게 가로 세로 들어서는 건물들을 볼 때 내 마음도 옹색해진다. 경주의 빈 절터는 이런 내 바람을 담아 시야를 무한대로 확장시켜준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한 때 융성했을 그 시간들이 스러져간 흔적을 더듬어본다. 무릇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돈다. 황룡사도 그런 생명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었나 보다.
황룡사의 봄 (사진 오세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지를 둘러싼 꿈 이야기가 넘쳐난다. 꿈은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한계와 구속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는 무의식의 세계다. 삶에 짓눌린 인간이 영혼의 자유를 통해 해방을 꿈꿀 때, 꿈은 하나의 실체로 다가온다.
늪지가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치며 뻘 흙이 되고, 그곳을 메워 절터의 기반을 다진 꿈의 초석자는 진흥왕이다. 꿈의 계시를 따라 궁궐터를 절터로 바꾸었다는 삼국유사 이야기는 당시 신라인에게는 법으로 다스리는 권력의 공간보다 마음을 모으는 정신의 공간이 더 절실했음을 시사한다. 진흥왕은 당대에 그 사업을 모두 이루려 하지 않았다. 손자 진평왕에 와서야 절의 금당이 만들어졌고 부족한 부분은 다시 증손녀 선덕여왕에게로 넘어갔다. 그 시대는 지금처럼 대통령 단임제가 아닌 2세, 3세가 이어갈 수 있는 왕위 계승의 시대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이 144년 완공을 위하여 지금도 공사 중인 것을 보면 단순히 시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진평왕은 치세를 위해 꿈을 만든 자이다. 5미터라면 보통세 사람의 키를 합친 높이다. 그런 크기의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지었다. 하늘에서 내렸다는 옥대는 소문이 무성하여 고려, 조선까지 전하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왕은 잦은 내란 속에 부대끼면서도 왕권을 튼튼히 했다. 그의 천사옥대는 옥황상제의 꿈이 서려 누구도 범접 못할 위엄의 상징으로 왕을 보호하는 부적이 되었다. 신라인의 재치와 지혜는 진평왕의 옥대를 다시 신문왕의 만파식적으로 재탄생시킨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꿈을 꽃피운 사람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승 자장 법사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 9층 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조공을 올 것이라고 선덕여왕께 조언할 때, 나를 놀라게 한 부분은 "9층 탑을 세우려면 백제에서 아비지를 불러와야 한다"라고 신하들이 입 모아 제안했다는 대목이다. 신라는 자신들의 탑 조성 기술력이 백제에 못 미침을 알았다. 서로 예민한 관계였을 텐데 상대국의 높은 기술문명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신라인의 자신감을 본다.
백제의 아비지가 이웃나라, 때론 적국이 되기도 하는 신라에 와서 탑을 세우는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런 아비지의 마음을 신라인들은 또 꿈으로 해결한다. 아비지의 꿈에 미완의 탑을 신라 노승과 장사가 금당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비지는 ‘내가 거역한다 해도 이 역사는 이루어지겠구나’ 생각하여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황룡사지는 온갖 꿈이 현실세계로 넘나드는 공간이다. 황룡사 9층 탑 완성은 신라가 중세의 문화대국으로 도약하는 시점이라 여겨진다. 선덕여왕이 9층 탑을 조성할 때, 이 과업은 우리나라 동쪽 끄트머리의 자그마한 도시가 동양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없다면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인은 변방은 곧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현실로 구현했다. 아파트 30층 높이의 동양 최대 목조 9층 탑이 경주시내를 아우를 때 이미 신라는 삼국통일의 길에 들어 선 것이다.
경덕왕은 그 꿈의 꽃씨를 널리 전파하는 통신사였다. 그때 글자를 알았던 사람은 6두품 이상이지 않았을까. 경덕왕은 문자 대신 소리로 백성과 만났다. 에밀레종보다 4배 컸다는 황룡사 범종, 종이 울리던 시간은 삼라만상이 영겁과 조우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범종소리는 황룡사의 마당을 가득 채우고 서라벌 구석구석 나지막한 집들과 아낙이 밥 짓는 부엌을 슬몃 지나, 망자들의 무덤을 위로하고, 남산 숲 속의 새들과 나무, 맹수의 귀에까지 가 닿았으리라. 만파식적의 전설적 피리소리도 이런 범종소리가 아니었을까.
문화재 답사로 일본 나라시 동대사(東大寺, 도이사지) 갔을 때 우선 절의 규모에 기가 꺾였다. 동대사 금당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금당 안의 비로자나 부처님은 손바닥에 16명이 올라갈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청동불상이다. 동대사 부속건물 정창원에는 ‘신라장적’이 보관되어 있다. 신라장적은 통일신라 4개 부락 살림살이를 조사한 기록문서인데 부처님을 감쌌던 종이라고 한다. 종이가 귀한 때이니 시효가 끝난 공문서를 포장지로 활용했을 것이다. 이 절이 신라와의 인연은 부처님 개안식(752년)에 신라사람 700명이 참여했다는 등의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대사의 금당을 보는 순간 황룡사 9층 목탑이 떠올랐다. 동대사의 지금 금당은 정면 7칸, 황룡사 탑도 정면 7칸이다. 얼추 계산해보니 동지사 금당이 세워진 기록이 728년이라면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조성되었으니 족히 70여 년 앞서 있다. 황룡사가 몽고 침략 때 불에 타버려 우리는 동양 최대의 기록을 일본으로 넘겨준 셈이다.
처음에는 애달픈 마음이 컸다. 경주에 있는 그만그만한 문화유적을 생각할 때 잦은 외침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기구한 역사에 속이 쓰렸다. 지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고대사와 중세에 걸쳐 한 때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줬다는 긍지를 들먹이는 것은 현재의 궁색한 처지를 과거의 영광으로 도배하며 사는 초라한 노인과 다를 바 무엇인가.
황룡사의 빈 터 (사진 누리 여행)
황룡사 빈들에는 소리가 가득하다. 솔거의 노송에 참새 부딪치는 소리, 원효대사의 경 소리, 백 여 명 스님이 지나가는 장삼 가사 서걱거리는 소리, 구층탑 올라가는 소리 그리고 번갯불에 육중한 탑이 쓰러지는 소리, 다시 세운 탑이 또 불탈 때, 바짝바짝 타들어갔을 마음의 소리까지.
황룡사 빈터에 서서 일연스님을 생각한다. 몽고 침략으로 탑이 불타고 경주시내에 한 달 동안 연기가 휩싸였을 때, 백성들의 자존감도 바닥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정신의 기초가 무너지려고 할 때 일연스님은 융성했던 황룡사의 소리를 썼다. 일연스님은 13세기 전쟁 속에서 살았다. 황룡사가 불탈 때 그는 30대였다. 그러나 어떻게 황룡사가 불탔는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대신 꿈의 영역이, 정신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기록하였다. 삼국유사를 쓰려고 70세의 나이로 인각사로 들어간 스님의 뒷모습은 황룡사 빈들의 바람소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