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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Sep 26. 2023

가장 달콤하고 시원한 끈

사람들 사람들

고등학교 2학년 때, Y라는 친구가 필리핀에 이민했다. 이민을 위해 그녀가 자퇴하던 날, 우리는 학교가 끝나고 종종 가던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향하던 길 Y를 떠나보낼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그 나라는 그렇게 덥다는데 어떻게 버티려고 그러냐, 가지 마라, 괜히 그런 엉뚱한 소리나 하면서 걸었다. 더위를 유달리 잘 타면서도 Y는 언제나 긴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다녔다.

 

여름이었고 그날도 무척 더운 날이어서 많고 많은 시내의 음식점 중 우리는 빙수집을 골랐다. 그 집의 빙수는 우유 얼음을 아주 곱게 갈아 시럽을 잔뜩 뿌려 떡이나 젤리 없이 과일만 얼음 위에 놓았다. 빙수가 무척 달았고 곱게 간 얼음은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렸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학교생활의 모든 순간을 Y랑 함께 보내서 그녀가 없는 그 공백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그걸 눈치챈 Y가 내게 말했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다시 만난대. 걱정하지 마."

 

Y가 필리핀에 도착하고 우리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씩 통화했다. 만리타국에, 그것도 열대기후를 가진 나라에다 더위에 약한 친구를 보내니 그렇게 걱정될 수가 없었다.


"거기 안 더워?"

"너무 더워서 힘들어."

"시원한 거 많이 먹어."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너무 긴장돼서 뭐든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던 Y는 이제 아이스크림을 입에 달고 살며 더위를 나름대로 극복하는 중이라고 했다. 어느 날은 통화 중 "나 할로할로 먹었어!"라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그게 뭔지 묻자 필리핀식 빙수라고 했다. 얼음 위에 우베 아이스크림과 젤리나 과일 등 여러 토핑을 얹은 빙수인데 그런 설명 대신, 그녀는 "근데 보라색이야. 신기하지?"라고만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면서 서로의 빈자리를 좁혀갔다.

 

나중에 Y의 학교가 방학했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만날 땐 겨울이었는데도 명학역 근처에 있는 빙수집을 갔다. 그녀가 한국에 잠시 머무를 동안 거의 날마다 만났는데 우리는 그 집에 자주 들러서 온갖 빙수를 번갈아 가며 먹었다. 이후 Y는 필리핀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너무 바빠졌다. 나도 입시를 준비해야 했고 Y는 필리핀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한다고 했다. 고3에겐 방학도 없었고 19살의 해에 우리는 결국 만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턴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겼다.

 

그러다가 내가 21살이 되던 해,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거기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밤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고 있는데, ‘쵸킹’이라는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가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대중적인 식당 중 하나라고 했다. 가게 안을 눈으로 훑고 있는데 보라색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빙수 사진이 벽에 붙어있었다. 보자마자 “이게 할로할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아주 예전에 그녀가 말한 대로 선명한 보라색이었으니까. 주문을 하고 먹어보니 아이스크림이 고소한 것 외에는 한국의 빙수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콩을 갈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Y에게 전화했다. “오랜만이야!” 반갑게 전화를 받아준 Y와는 처음에만 조금 어색했을 뿐, 옛날처럼 다시 편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 할로할로 먹어봤어!”라고 말하자 Y는 깔깔 웃으며, “그래? 맛 어땠어?”라고 물었고 나는 나의 할로할로의 첫 경험담을 “고소하더라”라고 한마디로 얘기했다. 우리는 또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만날 날을 기약했다.

 

 가끔 주고받는 통화에선 우리가 먹었던 빙수가 종종 등장했다. 명학역 근처에서 유독 맛있게 먹었던 빙수, 할로할로 빙수, 그리고 그녀가 학교를 떠나던 날 먹었던 그 빙수. 다른 건 다 까먹어도 그날 먹은 빙수 맛은 생생하다고 하니, “맞아. 되게 달았는데.”라고 답하며, 한국에 가면 그 집에 다시 가보자고 덧붙였다. 그리고 Y가 졸업하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다고 잔뜩 멋을 부렸던 터라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찬찬히 들여다보니 어린 날의 얼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뭐 먹으러 가?”

“빙수 먹으러 간다며.”

“근데 나 떡볶이가 먹고 싶은데.”

“후식으로 먹어, 그럼.”


 팔짱을 끼고 구석구석 누비다가 그 빙수집에 들어갔다. 비로소 웃으며 그 빙수를 먹을 수 있었다.


만날 사람은 다 만난대.


 그녀가 오래전 예사말로 던진 그 한마디가 사실 예사말이 아니었나 보다. Y와 나를 이어주는 끈은 아마 빙수일 것이다. 또다시 타국으로 돌아간 Y를, 나는 이제 당연히 기다리고 있다. 서서히 공기가 더워지면 나는 여름을 떠올리고 빙수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달콤하고 시원한 끈으로 팽팽히 연결된 우리를 떠올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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