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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Oct 03. 2023

문수에게

진지한 끼적임

문수에게


어쩐지 맺을 말보다 시작하는 말이 어려운 것 같다. 나의 오늘이 너에게 무해하길 바라.


나는 오늘도 내 옆머리를 길게 잡아당긴 뒤, 그걸 둥글게 뭉쳐서 손톱으로 긁었어. 버릇이거든. 하다 보면 머리카락이 툭 끊길 때가 있어. 옆머리가 계속 짧아지는 데도 손가락 밑에 살점이 살짝 까끌까끌한 게, 토독토독 소리가 나는 게 재미있어서 멈추기 어려워.


막막하거나, 실수하거나, 그러니까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내게 턱턱 닥칠 때 내 손은 옆머리를 찾아.


나는 지금이 쓸쓸하고 재미없다는 게 들키기 싫어서, 사람들 앞에선 내 버릇을 보여주지 않아. 그럼에도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 드러나기 쉬운 것이라,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더라. 못 볼 꼴을 보여 아차 싶은 마음, 어떡해서든 재미를 찾고 싶은 마음, 혼란스러워.


너도 그러는 게 있는지. 그렇다면 내 앞에선 몰래몰래 하지 말길. 눈감아 줄게. 아니면 우리 둘 다 해버리는 건 어때? 나는 머리를 뜯고, 너는 손톱을 물어뜯고.(만약 네가 그런 습관이 있다면).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가끔 파안대소하고 말자.


오늘은 나무 냄새가 많이 나는 카페에서 존버닝햄의 그림책을 읽었어. 좋아하는 카페야. 거기서 의자를 가장 좋아해. 나는 허리가 좋지 않은 편인데, 그 의자는 등받이 부분이 뒤로 옴폭 들어간, 아주 가벼운 원목 의자야. 허리가 좋지 않은 편이라, 의자에 대해선 엄격한 편인데, 아주 편안하고 좋아. 대포알 심프, 내 친구 커트니,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 모처럼 피곤하지 않고, 모처럼 허리가 아프지 않아서 다 읽었어.


만약 네 마음 한구석에 버림받음에 의한 생채기가 있고, 그것이 불쑥불쑥 올라온다면 그의 그림책을 읽도록 해. 너와 난(넌 그렇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멀리서 보면 지독히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엄마아빠를 만나서, 그들을 닮은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현듯 버림받음을 느끼지. 삶에서 내쳐짐을 느끼지. 그런 감정을 느끼면 나는 무서웠어. 그런 걸 느끼는 것보다, ‘대체 네가 무슨 버림을 받았다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거야?' 득달같이 달려와, 따질 것만 같은, 얼굴도 모르는 다수가 있을 것 같거든. 그래서 나는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눈도 코도 입도 흐리멍덩한 그들을 이해시킬 말을 떠올리느라 바빴지. 잊지 마. 항상 너를 동정해. 너를 진짜 가여워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런데 내가 나에게 하는 위로보다 더 사무치게 위로되는 그림책을 찾은 거야. 커트니, 심프. 하나 같이 버림받은 것 같이 보였는데, 얘넨 버림받은 적이 없더라. 트래벌 스티커가 잔뜩 붙은 여행 가방을 들고, 대포 속에 자신을 넣고, 어디든 가고, 누구든 돕고, 원망도 안 해. 왜냐하면 애초에 자기들이 버림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기꺼이 사랑하고 기꺼이 떠날 수 있는 거야.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그렇게 살고 싶어서, 마음에 단단히 새기고자 몇 번이고 읽는 것 같아.


그림책 읽는 거 말고는.


내가 먹지 않은 그릇을 설거지했어. 먼저 개수대에 버려진 음식물은, 가만두면 내내 신경을 긁을 터라 재빨리 쓰레기통에 버리곤 해. 손이 느린 편인데, 희한하게 설거지할 때면 재빨라. 수세미에 두어 번 짠 세제를 묻혀 조물조물 비비면 세제 거품이 풍성해져. 양념도 기름기도 그 정도면 사라지지만, 나는 그들을 다시 스테인리스통에 넣어. 아주 뜨거운 물을 잠시 부어. 김이 살짝 올라올 때, 베이킹소다가 든 세제를 몇 방울 풀어.


이제 남은 기름기도 없다, 물을 몇 번 버리고, 헹구고, 물이 맑아지면 계단을 만들듯 하나씩 접시와 컵을 쌓아. 그 안에 남은 물기는 밑으로 빠질 정도만 틈을 남기고. 접시에 흰빛이 돌고, 살짝 만지니 뽀득거리는 소리가 경쾌해. 싱크대 안에 맑은 물이 일렁이며 쪼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빠져나가면, 행주로 물기를 닦아.


내 덕분에 싱크대는 이전의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 음식 냄새 없이, 애초에 아무도 더러운 접시를 욱여넣지 않은 것처럼, 아주 말짱해져.


나는 설거지 정도는 아주 쉽게 해내는 사람이야. 내가 맥을 못 춘다 해도 설거지 하나는 잘할걸?


나한테 설거지가 그렇듯, 너에게도 그런 게 있다면 나한테 꼭 얘기해 줘. 촘촘히 설명해 줘. 마치 뜨개질하는 마음으로 들어줄게. 한 코 한 코, 불필요한 코는 하나도 없지. 나는 원래 듣는 걸 어려워 하지만, 온 마음으로 들어줄게. 내 경청이 실이 되어 네 마음을 넉넉하게 덮으면 좋겠다.


완연한 가을이 오나 보다. 손이 시리다. 너도 그렇다면 오랫동안 시리도록 내버려 두지 마.


세상 모든 문수에게

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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