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람들 13
지난한 무더위는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다. 하필이면 이때쯤 일 때문에 걷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이 더위가 야속하다.
연무동에 다녀온 날이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업의 과제를 하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더위를 먹어서인지 입맛이 없었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먹는 프랜차이즈 햄버거는 입에 대고 싶지도 않은 거다.
조금 있으면 아이를 돌보러 가야 하는데, 끼니를 거를 수도 없고. 밥집을 찾아보는데, 매생이 수제비를 파는 데가 있다. 파래나 다시마 같이 바다향이 짙게 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고, 매생이를 국에 넣어 담백하니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서 그건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연무시장의 끄트머리쯤에 있는 곳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가려면 시장 쪽은 지나지 않아도 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더위에 서러웠다. 더워, 더워! 아 어쩜 이리 무정하게 덥나, 가슴팍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걷는데 보이는 건물마다 연식이 좀 됐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죄다 재개발로 깎고 부수느라 한동안 난리였고, 지금은 높다란 아파트와 대리석 상가뿐이다. 그런데 이곳은 목조건물로 지은 주택, 빨간 벽돌로 지은 ‘맨숀’이 남아있다. 먼지가 쌓이긴 했지만, 왠지 이런 건물들은 삶의 흐름이 보여서 좋다. 이런 동네의 특징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이 사시는데, 늘 보면 집안에만 있는 게 답답하시다고 자주 나와 계신다. 낡은 의자나 상 하나 가져다 놓고 부채질하고, 찬물 묻은 행주 목에 두르시고, 힘겨루기 하나 없는 잡담 하시고, 철 과일 나눠 먹고 그러신다.
문 굳게 잠그고 사는 아파트들은 그게 보이지 않는데, 오랜만에 이런 골목을 보니까 참 예뻤는데. 이젠 재개발이 확정됐다고 한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한 군데에는 벌써 아파트 단지가 완성됐다. 아쉽다.
골목에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만났다. 날도 덥고, 폐지 더미가 묵직하게, 높다랗게 쌓여있어, 꽤 힘드실 텐데 숨소리도 고르시다. 거무튀튀한 폐지와 달리 할머니의 옷차림은 너무도 화사했다. 위아래, 연두의 바탕에 노란 꽃무늬가 알락달락한 옷인데, 내리쬐는 햇살 덕에 노란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매생이 넣은 반질반질한 수제비로 배를 채우고 아까처럼 조용했던 골목길이 아닌, 시장 쪽으로 나섰다. 잠시 조용했었는데, 중간쯤 지나더니 북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순간, 그 거리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걸었다. 생선과 다리가 축 늘어진 기다린 오징어를 쫙 펼쳐놓은 가게에서 바다의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파란 피케이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르는 할아버지, 자전거 벨까지 박자에 맞춰 탕탕 치신다. “으휴, 더워 더워!”하시며, 다리와 팔에 팽팽하게 힘을 주며 부지런히 수레를 미는 상인들. 분식집 아주머니는 스텐통 안에 물을 채워서 그 앞에 촥 뿌리시는데 물줄기가 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한다. 과일 과게. 자두의 새큼한 향은 멈춰서 맡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할머니들도 참 많이 나오셨는데, 어쩜 그들의 옷에는 우중충한 기미를 찾아볼 수도 없다. 모두 고운 색감의 꽃무늬 원피스, 고무줄 바지를 챙겨 입고 나오셨다. 떨어져서 그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는데, 마치 만발한 화원 같다. 요즘은 강아지들이 골목을 돌아다니는 걸 보기 힘든데, 흰 털을 가진, 백구 한 마리가 총총 지나간다.
다 다른 모습이고, 다른 옷차림인데 똑같은 게 하나 있다면, 햇빛 받은 그들의 얼굴이 너나 할 것 없이 찬연했다는 것이다. 마치 바다 위 윤슬처럼. 그 더위에, 땀에 온통 젖은 옷과 상관없이 그들은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거리를 빛냈다. 이 무더위에 걸음도 바삐 하지 않고 눈에 하나하나 담게 할 만큼.
오늘의 풍경이 여름이 주는 선물이었는지 모르겠다. 여름이라서 더 비릿하고 더 달큼한 냄새. 여름이라서 사람들의 얼굴에 단단히 스민 빛. 여름이라서 새파랗고, 샛노래진 사람들의 옷차림. 그래서 바삐 지나치지 않고 더욱더 관찰하게 되는 사람과 거리. 여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진풍경이었고, 선물이었다. 여름 끝자락에 적어 내려가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