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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주 Feb 25. 2021

삶에 값을 매길 수 있다면

요상한 바둑 이야기, 오늘 농심배 감상 / 에세이


신진서와 커제의 농심배를 보고 있다. 신진서와 커제는 각각 한국, 중국 1위 바둑 기사다. Elo rating 상 세계 1위는 신진서지만, 실질적인 1위는 커제로 보기도 한다. 기사 간 대결로서도 빅-매치며, 농심배는 유일한 세계대회 국가대항전이다. 신진서가 오늘 커제를 꺾으면 한국의 우승이다. 나도 애국자라 신진서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멋진 애국심.

오후 3시 26분 현재, 신진서가 미세하게 우위다. AI 바둑 선생님이 계셔서 흑백의 미세한 열위와 우위를 모두가 알 수 있다. 집 차이까지 보여준다. AI는 대체 어떻게 계산하는 것일까. 19*19 바둑판의 경우의 수를 3^(19*19)라고 하더라. 바둑판 한 칸에 흑돌, 백돌, 두지 않은 것의 3가지 경우가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 바둑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모양에 따라 두어지므로 유의미하게 수를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꽤 수가 많을 텐데, AI가 어느 정도 연산을 하길래 바둑판의 대부분이 비어있는 초, 중반에도 흑과 백의 집 차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KataGo 등 바둑 AI는 현재 바둑판 위에서 다음으로 유력한 수 몇 가지를 승률, 가치와 함께 표시해 준다. 또 유력한 수에 따라 다음에 진행될 수를 약 10수 내외로 보여준다. 아마 프로그램의 배경에서는 유력한 수 이외에도 다른 가능한 수를 꽤 많이, 어쩌면 전부를 꼽아 연산을 시작해서, 그 수로부터의 진행 역시 10수 훨씬 너머를 연산해내는 것이 아닐까.

보통 프로 바둑은 150수 내외에서 끝나기도 하지만, 끝(바둑판의 집 이외의 빈자리를 전부 메워 계가를 하는 시점)까지 두면 300수까지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바둑 AI는 약 20수, 또는 1수가 진행된 시점에서도 300수까지 전부 채워 연산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든 흑백의 집 차이를 정확히 계산한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죄다 연산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안다. 학습을 통해 한 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능력을 갖추고, 그 가치로부터 현재 흑백의 집차를 예상하는 것일 것 같다. 어디선가 그렇게 읽었다.

AlphaGo는 초기 단계에서 정책망과 가치망의 두 체계로 학습을 시작했다고 본 것 같다. 내게 지금의 AI는 물론 당시 알파고의 정책망과 가치망의 차이를 이해할 지식은 없다. 그래도 추상적으로 추론해서 이해해 보자면, 바둑 AI는 결국 수의 가치를 학습하는데 집중해서, 과도한 연산 없이도 수를 제시할 수 있는 나름의 체계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싶다. 10수를 둔 시점에서 200수 앞을 내다보지 않아도, 11수의 가치를 안다면 흑백 쌍방의 가치 차이가 산출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수의 가치란 충분한 횟수의 모의 대국을 통해 학습되는 것일 테다.

바둑의 종국에는 흑백의 승패가 가려지지만, AI에게는 승패 자체가 중요한 항은 아닐 것이다. 바둑의 승패란 백의 덤(핸디캡)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즉 초기 설정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패보다도 일차적으로는 흑백의 집 차이가 중요하다. 또한 결국에는 집의 차이와도 무관하게, 각 한 수가 집을 얼마나 버느냐, 다시 말해 한 수의 집의 값이 중요항이 될 것이다. 한 수의 가치를 집의 정확한 값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바둑 AI의 핵심이 아닐까.

아는 것 없는 상태에서 가정에 가정을 거듭해서 세운 가설이기는 하지만, 대강 맞다고 한다면 꽤 흥미롭고 무섭다. 가령 이런 것이지 않나. 오늘 내가 무언가를 한 시간 했다. 그 활동에 값이 매겨진다. 수많은 변수를 학습해서 가상의 생산성을 계산할 수 있다면 말이다. 글을 어떤 내용으로 한 시간 써서 +2k, 또는 -1k의 성적표를 받을 수 있다면, 무섭고 재밌겠지.

실제 세상에는 변수가 훨씬 많고 가치의 종점도 바둑판 집의 값과 같은 단일한 목표에 있지 않다. 그래서 저런 일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상상해보니 재밌었다.

글을 쓰는 중에 신진서가 유의미한 우세를 잡아가고 있다. 커제는 기분이 표정과 행동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기사다. 재밌는 제스처를 보여주고 있다.

글의 마무리를 우리 삶의 대단한 무언가로 연결하고 싶지만 멍해서 이만하련다. 사실 그런 대단한 것은 없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상상은 재밌다. 무엇이 계산될까. 무엇으로 이어질까.

바둑 이야기를 오래 적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됐다. 그 와중에 마침내 신진서가 승리를 거뒀다. 한국 우승! 오늘의 나는 멍하게 글을 썼으며 신진서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AI 관련 지식이 전무한 문과생의 막막한 상상입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혹시 보태주실 내용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보충해주세요. 이것보다 풍성해질 것 같아요.


건강하시고, 칼퇴하세요. 글쓴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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