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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주 Feb 28. 2021

특기는 자는 것

불면과 과수면 사이 / 에세이


하루 쉴 때가 되기도 해서 어제 하루를 그냥 날리기로 했다. 이왕 쉴 것 즐겁게 보내면 좋았겠지만 그럴 만한 일은 딱히 없었다. 평소대로 먹고 잤다. 많이 먹었다. 많이 자기는 했는데 부지불식간에 잠들고 깼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해서 얼마나 잤는지 감이 안 온다.

이렇게 자면 수면의 질이 좋지는 않은 것 같다. 길게 잤지만 피곤하다. 그래도 계속 자고 싶을 땐 피곤함이 이롭다. 먹으면 더 피곤해져서 금방 다시 잠들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자고 일어나서 먹고 다시 잤다. 또 일어나서 먹고 다시 자니까 여전히 피곤하다. 이제 일어나서 뭔가 하려면, 그리고 그렇게 많이 잤으니 피곤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다.

하루의 일과가 먹고 자는 일 말고 없을 때는 깨어있는 것이 꽤 괴롭다. 생각과 감각이 밀려오기 전에 어서 잠을 청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청하는 것이라, 다 들어주질 않는다. 그래도 살아있는 탓인지 무한히 잘 수는 없다. 언젠가는 깬다. 원치 않은 기상의 시각은 제각각이다. 너무 낮일 때도 있고 너무 밤일 때도 있고 너무 아침일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다 너무한 시간이지 않을 수 없다. 깨어있는 것이 이미 너무해서. 너무 일상인 것을 잠시는 버텨야 한다. 조금이라도 일찍 다시 잠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수면제를 안 주셨나. 아주 자기 힘들 때가 있었는데 기어코 안 주시더라. 야속해라. 얼마나 야속했는지 아직도 야속하다. 정말 자고 싶었는데.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몸이 못 버티고 꺼지면 5분마다 깼다. 미칠 노릇이었다. 영원을 잘 줄 알았더니 겨우 5분이 갔다고. 이 시간이 다 가야 이 지긋지긋한 고통도 이 삶도 끝날 수 있는데 고작 5분이라고. 미칠 노릇이었다. 고작 5분이라도 계속 잘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안 됐다. 한 30분이 고작이었을까. 5분을 여섯 번 해서. 그것도 미칠 노릇이었다. 너무 자고 싶고, 너무 오래 자고 싶고 너무 길게, 그러니까 깨지 않고 계속해서 너무 자고 싶은데 5분. 너무하시지 않냐고, 어딘가에 소리 지르고 싶었는데 소리 지를 데가 있나. 세상에 이러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일걸.

아마 당시 나의 불면은 정상 수면의 불능이 아니라 과수면의 좌절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주 많이, 가능하면 영원히 자고 싶은데 실제로는 아주 적게 자는 것과의 괴리. 그래서 수면제를 주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신 것이 아닐까 지레 짐작해본다. 당시 나도 왠지 알 것 같았으므로 더 요청하질 못했다. 겨우 힘을 짜내 달라고 말했는데 안 주셔서 더는 힘이 없었던 것도 있었고.

정상 수면이 작동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괜찮았을까. 예를 들면 도저히 자질 못해서 밤을 꼴딱 새운 채로 출근해야 하는 것이다. 업무 능력이 급속도로 저하된다. 그렇다고 낮에 잠이 오는 것도 아니라 수면을 보충할 구석이 없다. 며칠이고 반복되다가는 신체가 무너진다. 정말 못 자니까 말이다.


자는 생물은 웃기지. 잠은 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게 되는 것이다. 입력된 조건에 따라 주기적으로 실행되도록 설계되어 있잖아. 명령을 벗어나면 신체 조직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꼭 벗어나는 누군가가 있단 말이야.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벗어나지는 것이고. 뭐 어쩌자는 것인가. 정상이 아니게 된 사람은 어떡하라고. 버그는 고치면 된다. 약을 만들어 먹는다든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고쳐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내가 버그였던 시간은 어쩌자는 것인지. 그것도 고쳐줘야 하는 것 아닌지. 없던 것으로, 다 정상이었던 것으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내가 스스로 버그가 된 것도 아니고, 버그가 나를 밀어낸 것인데, 그러다가 어쩌다가 한동안 버그가 되어버린 것인데, 한참 뒤에 버그를 고쳐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마냥 입을 슥 닦아버리고. 고쳤으니까 된 거 아니냐, 고쳐졌으니까 된 거 아니냐고. 그런데 고쳐져 있지 않았던 동안, 벌레였던 동안은 대체 뭐 어떡하라는 것이야. 그것도 슥 닦아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렇지만 나는 정상 수면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마땅히 하는 일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고 애초에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버그가 떠도 별 상관이 없었다. 자든지 말든지, 못 자든지 안 자든지 많이 자든지, 어차피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었으니까, 정상 작동을 하든 오작동을 하든 작동만 하면 되었다. 애초에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조금 고통스럽다고 해도 당연했다. 사실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고 무지하게 아팠는데, 또 사실은 아픔의 정도가 크다고 해서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라서, 하여간 당연했다. 그래서 버그였다는 것도 아팠다는 것도 그 시간도 하여간 다 당연했다.


당연하니까, 사실은 버그도 아니었고 아프지도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연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니까. 아팠어. 당연하지. 당연했지. 당연하다의 뜻은 "마땅히 그러하다"니까, 그럴 만했지. 아플 만했지. 아플 만해서 아팠으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어쩌라고? 아팠는데, 어쩌라고? 당연한 거잖아. 어쩌라고.


어쩌라고, 라고 하면 아픔이 다 지워진다. 당연하게 아팠다면 없었던 일이나 다름없다. 정상이다. 버그가 아니다. '어쩌라고'지. 고쳐줄 것이 없다. 아프지 않았던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계속했으므로 더 이상해졌다.

그래서 좀 당연하지 않게 아파봤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어차피 아픈데, 당연하지라도 않으면 좋겠다. 무척 심한… 버그면 좋겠다. 누구나 보고 깜짝 놀라게. 아이고 무시라, 깜짝이야. 어째 그리 살았냐. 그래서 황급하게 막 고쳐주고. 그렇다면 참 좋겠다. 세상을 깜짝 놀래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놀랍지 않았으니까 조금 슬펐다.

그러다가 잘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무척 많이 잘 수 있게 되었다. 취미가 뭐예요, 자는 거요. 특기가 뭐예요, 자는 거요,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쳐졌다. 참 다행이었다. 누가 고친 것인지 정말 잘 고쳤다.

가뭄이 오다가 홍수가 나도 당연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세상에 실제로는 버그도 없고 설계자도 없고 당연한 것들만 있다.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을…

그렇지만 자꾸 당연하지 않았다고 누가 그러는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자꾸… 짜증 나게,



2021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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