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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주 Mar 02. 2021

도대체 소설을 쓸 이유가 뭐야

저가 쓰고 싶어요

각오, 목표, 계획, 그리고 일기


각오

써 둔 엽편 하나를 어제 발행할까 하다 관뒀다. 관심을 흡입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들었지만 저번의 혹평 일색의 리뷰가 불쑥 생각났다. 이 시기에 조금이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 약간의 자극만 있어도 최소 며칠은 무너질 테다.

발행하고 싶었던 엽편은 ‘김렛’이었는데, 왜 제목을 김렛으로 지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무척 멋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제시하고 싶었던 애잔한 마음은 기억난다. 그래서 제목부터 적고 시작했다가 제목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젠가 김렛을 몇 번 더 마셔 보고 귀환법을 생각해 봐야지.

브런치 작가 신청을 넣기 위해 블로그에 올린 엽편들을 훑어봤다. 지금보다는 잘 쓰던데…? 재미는 없지만 어떻게든 이야기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티가 났다. 단편 길이에 못 미치지만 내가 쓴 것치고 분량도 제법 많다. 지금은 그만한 길이로 이어 쓰기 힘들 것 같은데. 무슨 각오 같은 것을 하며 썼나. 신기하다.

학교 등록 관련 절차를 마무리하는 한 주가 될 것 같다. 수업도 시작한다. 잘 견딜 수 있을까. 오늘은 버텼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당장 학교에 관한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옳겠지만 오늘은 그와 무관한 글을 쓰고 싶다.


목표

일어나서 생활하기를 1월 말부터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즐겁게 썼던 시기가 있나 싶었는데, 있더라. 18년 2월 즈음의 이야기다. 새삼 블로그의 일기를 들춰 보니 그랬다. 그땐 뭐가 즐거웠을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때도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2018년은 불안하며 움트는 한 해였겠구나. 늘 겨울에 뭔가를 한다. 하지만 그해 2월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을 시점일 텐데… 생명력 같은 것이 그때 있었을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분노와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 힘이 그때 벌써 있었나. 기억이 잘 안 난다.

기억이 안 나지만 불쌍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때는 그럴 수 없었을 텐데. 도저히 살 수 없었을 텐데. 그럴 수가 있었나. 어떻게 살아남았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이렇게 떠올리는 것을 보면 다 낫질 않았나 보다. 어느 정도 나았다고 생각했다. 병이 아니라 기억 같은 무언가가.

다 제거하지 못했다. 하나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쓰면서 불쑥불쑥 온갖 단어에 온갖 기억이 붙는 것을 보면 그렇네. ‘기억’에도 붙어있다. 단어는 좀 남겨주지 그랬냐. 기억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기억’ 단어를 적는 그 자체로 기억을 불러오면 좀… 심하지 않나. 그때, 수업에서 역사와 기록과 기억의 차이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기억을 파괴하고 재구성해서 삶을 조종하는 힘, 구체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욕망에 대해 배웠는데 그것이 내게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다. 내 탓, 내 탓, 내 탓이라고… 오래 생각했다.

다리가 불타오르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누군가의 표현을 좋아했다. 나는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변할 수밖에 없는, 변’해지는’ 부분도 있다. 아주 강한 힘으로 구부리면 구부러지는 것이다 사람은 쉽게 숟가락처럼. 내가 만약 변했다면 그 하나다. 사람이 다 숟가락이고, 내가 숟가락이구나, 이런 상상 하나. 구부러지고 알았다.

그러고 보니까 구부러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다 조금은 휘어있다. 오른쪽으로 위로, 사방팔방으로 휘어지고, 나선으로 꼬이기도 하고, 절단이 나기도 하고, 젓가락이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애초에 휜다는 것이 뭐지, 다 구부러졌잖아. 핀 사람을 찾는 게 빠르겠어. 어째서 당신은 구부리지 않았냐…고 묻는 거야.

그치만 그 사람도 구부러져서 폈다.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일에 예민해졌다. 사람은 쉽게 영향을 남에게 준다. 가만히 서서 내뿜고 있으면 알아서들 주워가는 유형이 있고, 여러 유형이 있고, 칼을 들이미는 유형이 있다. 줄기를 찢어서 진액을 마신다. 흡입하는 소리를 내면서. 또 칼을 쥐여주는 유형이 있다. 네가 스스로… 찢으라고.

왜 이런 이야기가 됐지. 글을 앞으로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을 적으려고 했다. 읽고 배우고 쓰고 배워서 내공을 쌓고 공모전과 기고처를 찾아가고 싶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 시간이 부족한 것 같지만 어떻게든 쓰고 싶다. 그 목표와 자신의 연결고리를 요즘, 또 예전부터 찾고 있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매듭 하나를 만들었다.

언젠가 너무 당당해져서 매듭 몇 개를 만들었다고 보고하지 않아도 자기 내부에서 자신의 고통과 변화를 이해하고 처리하는 멋진 새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이렇게 내 보이지 않으면 어렵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말해줘야 한다. 견뎠다, 나쁘지 않았다, 조금 만들어도 봤다, 이렇게 말을 내뱉어야 굳을 것 같다.

가끔은 불을 놓고 죄다 타버리기를 바란다. 쳐다볼 수 없는 일들 뿐일 때. 하지만 타지 않고 남아 날 반기는 것이 있을까,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가끔은 말로 굳은 형상이 나를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언젠가 내가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지라도 당장 잠깐은 곁에 있어 주길.

언제까지고 구부러져서 머리와 발이 만나도 좋다. 너, 더 이상 숟가락이 아니구나. 국물도 뜰 수 없어.

아, 또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최대한 독자를 의식해도 나만 아는 이야기, 나만 읽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는 뜻에서다. 그래서 내 이야기, 내 맥락에서 드는 감정을 남과, 세상과 공유하고 싶어질 때 새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누고 싶을 때, 나눌 형상이 필요해서. 예를 들면, 따뜻함과 감사함을 나누고 싶을 때 머핀을 굽는 것이다. 마음은 직접 전달되지 않으니까 머핀을 통해. 그래서 그가 한 입 베어 물면 내 마음이 우지끈, 하고 달콤한 즙으로 그의 입안에 남는다. 그래서 머핀이 말이 되고 글이 되고 소리가 되고 향이 되고 작품이 되고 어떤 것이든 형상이 되고, 또 언젠가는 마음 자체가 되겠지.

그래서 이야기를 쓰는 것인가 싶다. 나만 여럿 등장하는 무대에서 내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관객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어딘가로 옮겨서, 나도 잘 모르는 인물들이 말을 밖으로 뱉도록 써야 한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살아있는 캐릭터. 나와 모두에게 평등하게 낯선 이야기. 대신하고 빌리는 일, 거짓말, 소설적인 것. 내 맥락의 우위에 기반하지 않은 어떤 중립지대와 인물이 필요하다. 나만 등장하는 소설이 되지 않도록. 읽히기 위해서는 말이다.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장소를 옮기자.’ 이런 클리셰 같다. 한적한 황야로 순간이동해서 자웅을 겨룬다. 그곳은 어디도 아니어서, 나와 너와 또 많은 사람들이 무슨 파동포를 마음껏 쏘듯이, 읽고 쓰면서 무언가를 마구잡이로 교환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 판을 까는 작업이고, 그 공간을 창조하겠다는 의미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 아는 이야기로부터 점차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로. 쓰고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는 이야기로. 그렇게 하고 싶다.

그게 무엇이든. 이야기든 소설이든, 머핀이든 숟가락이든.


계획

오늘의 일기는 각오, 목표, 계획의 삼부작이었다. 하지만 다 마음대로 썼고 그래서 계획은 없다. 계획은 나중에. 나는 J가 아니다.




2021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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