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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an 11. 2020

이젠 나만의 찬란함을 찾을거야

사람여행

엄마로 살면서 늘어난 능력? 그건 글 쓰는 거와 삶에 필요한 적정기술을 알게 된 일인 거 같아. 글 쓰는 것은 뭐랄까, 나와의 대화였지. 엄마는 집에서 누구와도 제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대상이 없잖아. 모든 걸 혼자 선택해야 할 때가 많고. 그런 상황마다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그게 글쓰기 능력이 되었더라고.      


적정기술은 전문성이 범람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세상에서 최대한 알뜰하게 살림을 해내면서 생기게 된 능력이지. 고비용 전문 기술보다는 직접 내 손으로 최소한의 돈을 들여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을 익히게 된 거야. 예를 들어 화장실 좌변기 뚜껑에 금이 살짝 갔을 때도 욕실 공사하는 곳에 물어보면 좌변기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고 하거든. 신경만 쓰이고 돈 안 되는 일은 요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혼자 해야 하는 거야. 아는 사람 중에 비데를 장착하느라 깨끗할 걸 떼어놓았다는 사람을 수소문하고 직접 그 뚜껑을 가져와 갈아 끼우는 식이지. 집안에서는 사실 그런 일 천지잖아.      


언젠가 수의(壽衣)를 배우러 갔더니 선생님이 재봉틀을 이용해서 가르쳐주더라고. 하지만 당시 우리 집에는 재봉틀이 없었거든. 곰곰 생각해봤지. 옛날에는 누구나 손바느질로 했을 거 아닌가. 돌아가신 분이 수의를 입고 돌아다닐 일도 없는데 굳이 재봉틀로 박음질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해보며 내 형편에 맞는 대안을 찾는 거지. 그냥 돌아가신 분에게 새 옷을 잘 입혀 보내드리는 정성으로 손바느질을 하자는 결론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그렇게 하나씩 따져보며 살아가다 보니 불필요한 비용이나 노력을 줄일 수 있었어. 삶에 꼭 필요한 만큼의 적정기술 수준을 알게 되었달까.      


그런 것에 자신이 생기니 이젠 나보다 돈이 많거나 아주 잘 나가는 사람 옆에서도 과히 주눅 들거나 초라해지지 않더라고. 남편의 병간호를 하며 지낼 때도 그렇게 슬프진 않았어.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누구나 일어날 만한 과정의 일부라고만 생각했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거 같아. 종종 SNS에 간병 기록을 남기곤 했는데 아무도 내 글에서 슬프고 힘든 감정이 읽히지 않더라 하더군. 어떻게 그렇게 달관한 사람 같냐고. 모르겠어. 아마도 세월이 지나 서서히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생기게 된 거 아닐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스물여섯에 시집을 왔는데 그때는 남편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어떤 것들을 누릴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았지. 나의 행복이 외부 조건이나 남의 시선에 좌우된다고나 할까. 그게 꼭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야.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치는 거잖아. 첫애를 키울 때는 많은 것들을 경험시켜주려고 나도 극성을 떨었어. 어쩌면 그 아이를 통해 대리 만족을 했을 거야. 요즘 젊은이들은 신혼 초부터 육아 분담을 위해 끊임없이 투닥거린다는데 그조차 다 일종의 과정이 아닐까 싶어. 그런 시기도 없이 사람이 어떻게 그냥 나이를 먹겠어. 다만 우리 시절에는 남편이 나가서 돈을 버니 그만큼은 아내가 집안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생각은 있었던 거 같아. 남녀 차별이 아니라 일종의 영역 분담이었지.      


하지만 명절에 시댁 가는 일은 한 번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어. 이 집에서는 그냥 며느리가 아니라 일꾼이 필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고약했거든. 전혀 존중받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 시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다섯 아들을 키우셨대. 그런 어머니였는데도 며느리들을 대하는 방식이 참 별로더라고. 그렇게 불편한 심사를 가진 며느리들이 차려낸 밥을 기어이 먹어가며 지내는 명절이 참 못마땅했지.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것들을 뭘 또 그렇게 못 참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젠 그런 걸 강요했던 시부모님도 다 돌아가셨지만 말야.  

   

요즘 나는 명절을 그냥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시간으로 활용해. 아이들도 좋아하지. 재작년 남편을 보내며 많은 걸 생각했어.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진정한 가족인지 말야. 나를 염려하고 도와주고 위로하고 힘을 보태는 사람이 정작 누구인지. 결국 남편은 고향 선산이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외할아버지가 계신 가까운 납골당에 모시게 됐어. 그래야 자주 가보니까.  남편이 살아있을 때 우리들은 서로 똘똘 뭉쳐서 상대가 원하는 것들을 해주려고 애쓰면서 살았던 거 같아. 남편은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돈을 버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러면서도 첫 딸에게는 지극한 사랑을 쏟아부었지. 안 데리고 가는 데가 없을 정도로 늘 옆구리에 끼고 살았어. 아이들에게는 정말 좋은 아빠였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특히 신경 썼던 부분은 본인 판단력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자료를 늘려주는 일이었어. 작은 애는 대안학교에 보냈어. 원치 않으면 꼭 대학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해줬지. 걔는 지금 자기가 원하는 다른 공부를 하는 중이야. 이 아이가 가끔 자기 형편보다 과한 물건을 사고 싶어 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나는 좀 무리가 되더라도 웬만하면 사 줘. 사람이 한번 해본 것과 아예 못 해본 것은 여운이 다르잖아. 평생 못해봐서 한이 되는 거 보다, 경험하고 나면 괜한 욕망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지. 그러면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본인이 해보고 싶다는 건 되도록 말리지 않고 힘껏 도와주고 있지.      


결혼 시기가 가까워진 딸에게는 굳이 결혼식을 할 필요 없다고 말해줬어. 아빠 가 살아계셨으면 아마 좀 달랐겠지. 좀 더 형식적인 것을 고려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저희들이 원한다면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야. 그렇게 말은 해놨지만 얼마 전엔 화려한 지인 결혼식에 딸애를 일부러 데리고 갔었어. 직접 본 다음에 선택할 수 있도록. 막상 가보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에서 본인들이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나는 그냥 기회를 줘. 아이마다 다른 특성이 있는데 괜히 내가 결정하는 것보다 본인들이 자기에게 맞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지. 그런 버릇이 들어야 자기들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거 아니겠어.      


어릴 땐 사랑의 완성을 결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돌아보면 결혼생활은 그냥 건강한 성인 간의 계약인 거 같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당연한 이야기 아니에요? 하고 반문을 하더라. 격세지감을 느끼지. 우리 또래들과 그런 말을 나눴다가는 아주 몹쓸 사람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난 후, 나는 가끔 우리 사이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 해보곤 해. 남편의 지인들이 나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이 그래도 잘 살고 갔구나 싶어져. 하지만 살면서 언제나 남편에게 만족스러웠다면 거짓말이지. 남들은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했는지 왜 모르냐고 하지만 정작 나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거든. 그래서 언제나 어떤 애정 결핍 같은 게 있었어.      


생각해봐. 집에서 살림을 한다는 건 최고의 관심 대상이 어쩔 수 없이 남편과 가족일 수 밖에 없잖아.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아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니까. 그런 엄마의 주부 역할에 비해 아빠 역할을 맡은 남자들은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 표현이 모자랐던 거 같아. 게다가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은근히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표출할 때는 참 서운했었지. 언제나 뭔가 좀 속은 기분이었어. 그런 결핍감 때문에 나름 좀 더 해줄 수 있는 것들도 인색하게 마음이 옹그라지는 면이 있었달까. 그 감정을 좀 더 빨리 떨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남아. 오히려 남편이 병을 얻고 나보다 훨씬 약한 사람이 되고 나니까 사랑이 막힘없이 그냥 술술 넘치더라고. 사람의 심리가 참 묘하지. 그랬던 남편으로부터 이제 나는 강제적으로 독립한 셈이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으니까.     


아이들도 다 컸고. 각자 지낼 수 있도록 함께 살던 집도 팔았어. 정말 내 앞으로 가방 하나만 남기고 모든 것을 처분했지. 이제부터는 정리 컨설던트로 나서도 될 정도야. 내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트렁크 하나로까지 줄여본 경험의 소유자니까. 그러고 나서 엄마 혼자 사시는 고향 집으로 내려왔어. 엄마 역시 독립적인 분이라서 여태까지 혼자 잘 지내셨는데 내가 들어와서 모든 걸 흩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 각자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야. 열아홉에 서울로 떠나온 다음에 한 번도 같이 살지 않던 나의 엄마가 한편으론 낯설기도 해. 그녀를 관찰하며 나의 미래를 점치고 있어.      


요즘은 작은 나의 방에서 미래를 위한 암중모색으로 다양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지. 전업주부로 살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하며 살았으니 배운 걸 혼자 실험해보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 아티스트웨이라는 책을 함께 읽으며 공부하던 분의 소개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살롱 9’에서 일을 한 적도 있었어. 그때 정말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 나중에는 한동안 팔을 쓰지 못할 정도로.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처럼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그만큼 좋더라고. 너무 신나서 다니니까 남편도 많이 응원해줬어.   

   

아이들이 고등학생 때라 굳이 엄마가 필요하지 않은 때였거든. 남편만 좀 참아주면 되는 상황이었지. 거기 다니면서 해봤던 고양이 소품, 아티스트웨이, 글쓰기 등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살아갈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아. 큰 밥벌이는 안 되겠지만 남편과 가족 없이도 스스로 시간을 채우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이 되어줄 거야. 그러다 보면 또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기회가 생길 거고. 걱정은 없어. 스스로 원하는 걸 찾는 능력이 있고, 필요한 적정기술을 터득하는 실천력이 있고, 가볍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말야. 어찌어찌 적정한 예술가로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구본형 씨가 내게 ‘당신만의 찬란함을 찾으라’고 써준 엽서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 그래, 나는 이제부터는 나만의 찬란함을 찾아갈 거야.




2019 서울시50플러스재단 당사자연구 <엄마경력을 살려 자기 일을 찾은 50+ 선배주부 성공사례> 보고서의 일부로, 아티스트웨이 파트너로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50+선배주부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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