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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Oct 19. 2021

전업주부는 언제 은퇴해요?

생각의 씨앗

     한 사람의 인생 결정에 유년기 경험은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올해로 아흔 살이 훌쩍 넘은 엄마는 6·25 전쟁 속에서도 학업을 계속하여 대학 졸업장을 거머쥐었던 극소수 여성이었다. 그렇게 받은 교육을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직장 선배들의 강권에 못 이겨 엄마는 다섯 자식을 낳은 종갓집 며느리가 되어서도 교직 생활을 지속하였다. 지금도 나는 가끔, 밤늦도록 양말에 전구를 끼우고 발뒤꿈치 구멍을 깁던, 추운 겨울에 국에 만 밥을 마시며 허겁지겁 스타킹을 신던, 퇴근하자마자 외출복 그대로 부엌으로 뛰어들던 엄마의 옛 시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 영향이었는지 결혼을 앞두었던 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멀쩡한 직장부터 때려치웠다. 집에만 있는 엄마로 살고 싶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사회로 먼저 나간 엄마의 삶을 바라보며 거꾸로 나는 뒷걸음질 쳤다.  직장 엄마가 힘든 것은 자라면서 보고 알았지만, 전업주부 엄마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미처 헤아려보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보니 평생을 전업주부로 사셨던 시어머니가 마치 선임하사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사회 변화를 감지하고 조금씩 눈높이를 조정할 수 있었던 친정엄마와 달리 집안일에만 전념해온 시어머니의 가정문화는 충격적일 만큼 고리타분했다. 결혼하면 흔히 겪게 되는 가정문화의 괴리감이 내게도 크게 다가왔다. 그런 것에 적응할 새도 없이 직장 때려치우고 ‘놀게’ 된 내게 집안일은 인정사정없이 몰려왔다. 그제야 주부들이 왜 ‘살림’을 한다고 하는지 알게 됐다. 집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내 앞에 와서 죽겠다고 아우성이었다. 화분도 시들고, 음식도 상하고, 먼지도 쌓이고, 아이도 징징대고, 이런저런 사람 관계마저도 먼저 돌보지 않으면 쉽사리 허물어졌다.    


꼭 사기를 당한 것만 같았다. 왜 가족끼리 어울려 살기 위해 누군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치열하게 바깥 활동에 바쁜 엄마를 보고 자라 선 지, 애초 성격이 그랬는지, 젊은 시절의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기다려주고 함께 걱정하며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엄마들의 살림 9단 노하우를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앞에 다가와 시들어가는 그 모든 것들을 내 손으로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노력만큼 이뤄지는 게 없으니 그것도 영 불만이었다. 문제 상황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해결책을 요구하며 끝없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세상이 미웠다. 매뉴얼도 없고, 참고자료도 없으며, 스펙도 한 줄 안 남는 집안일을 하느라 당장 나부터 죽을 판이었다. 왜 세상은 이렇게 아무 대가 없이 힘들게 사람을 낳고 키우고 돌보는 엄마들의 편에 서주는 법이 없을까. 왜 뭐든지 팔아먹으려고만 하고 죄의식만 심어주고 때마다 잘난 척하면서 가르치려고만 드는 걸까.


그런 종류의 부글거림을 안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주위를 기웃댔다. 책도 읽어보고, 이웃 이야기도 들어보고 전문가 조언도 들어봤지만 딱히 마땅한 답을 얻지 못했다. 폭풍우 치는 바깥 사정보다는 그 안에서 회오리치던 내 마음이 더 문제였으니까. 하는 수 없이 속이 부대낄 때마다 정답 없는 삶의 바다에서 마음의 별을 찾기 위해 글을 썼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더니 여성가족부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우왕좌왕 헤매는 동안 아이들은 세월 따라 성인이 되었고 이젠 굳이 전업주부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시나브로 집안일도 줄어들었다. 길다고 생각했던 결혼 육아의 파노라마가 돌아보니 30년. 이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날이 그만큼 더 남아있었다.


우리 시대 엄마들은 그런 세월을 어쩔 수 없었다. 때론 자식 기다리다 지쳐 이제 그만 나 좀 봐달라고 노여워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웅크려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이젠 다들 조금씩 깨닫고 있다. 더는 그런 방법으로 엄마의 시간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을. 싫든 좋든 세상은 불가항력적으로 각자도생의 분위기로 넘어가고 있다. 면면히 이어오던 엄마 인생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객관적인 조건은 더 열악해졌다. 혼자 보내야 하는 여명은 늘어나고, 자식들 숫자는 예전보다 줄었으니까.


60 노인이라는 엄살은 이제 먹히지도 않는다. 잔병치레 많으셨던 시어머니도 종종 자식들에게 ‘이 60 노인이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하면서 은근히 어리광을 부리셨는데 그랬던 분도 실제로는 90까지 사셨다. 70이면 가겠지 하고 있다가 80, 90이 될 때까지 여전히 살아있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얼마나 곤혹스러우셨을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난 후에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늘 외로워하셨다. 기대보다 미진한 가족들의 감사와 인정에도 목말라했다. 그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조금쯤 화가 난 상태였다고나 할까. 어쩌면 팔자 좋은 전업주부의 표상처럼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시어머니도 속으로는 남들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랑거리는 많았어도 그런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여기저기 살피느라 정작 자기 마음 돌볼 새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60의 시어머니를 만나 90에 돌아가실 때까지 30년간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나는 참 오랫동안 전업주부의 은퇴시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고령화 가족'도 심란함을 더했다. 영화관에 앉아 주인공으로 나온 늙은 엄마 윤여정의 심정을 헤아려보다가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늘어나는데 왜 이렇게도 가족은 변하질 않을까. 마흔 넘어서도 엄마엄마 응석 부리는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는 고령화 가족의 일상은 이미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잘못하면 싱크대 앞에서 밥만 하다 죽을 거 같은 전업주부로서의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조기 은퇴가 걱정인 세상에서 나는 외려 전업주부만은 종신제라고 할까 봐  혼자 전전긍긍이었다.


그런 고민으로 세상을 기웃대다가 평생교육 민간단체 ‘지혜로운학교’ 운영위원을 맡게 되었다. 거기서 여러 명의 은퇴한 남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조심스러운 불평이 참 인상 깊었다. 자기들도 세상이 말하는 ‘삼식이’로 구박받으며 지내는 게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내가 자기 영역인 부엌살림을 건드리면 기분 나빠하기 때문에 그냥 주는 대로 앉아서 얻어먹으며 지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끔씩 부엌에서 아내가 덜그럭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 보기 싫다고 나가라는 소리 같아서 눈치껏 바깥을 배회하기도 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고. 물론 요즘 부부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여태껏 들어왔던 아줌마들의 하소연과 너무나도 다른 아저씨들 하소연에 정신이 다 번쩍 들었다. 함께 살면서도 서로 이렇게 입장이 다를 수 있다니. 여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는 한쪽 소리만 들으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솥뚜껑 운전이 무슨 그렇게 절대 권력이라고 그렇게 텃세까지 부리는 것일까. 도대체 삼식이 밥 차리느라 허리가 휘어진다던 아내들은 남편들의 이런 속마음을 알고나 있을까. 은퇴 시점엔 부부가 부모로서의 의무 분담이 아니라 동료처럼 각자의 일상을 존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가 필요했다. 가정을 일터처럼 여기며 집안 살림을 해왔던 전업주부도 남편이 은퇴할 때는 엄마라는 이름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그렇게 쓸고 다듬던 집안일도 느슨해진다. 그렇다고 갑자기 집안 부엌을 닫아걸 수도 없는 노릇. 괜히 싸고 좋아 보이는 식재료라도 눈에 띄는 날엔 한아름씩 사 들고 와서 필요없는 일거리를 만들곤 했다. 고생해서 만들고 한두 번 먹다가 상해서 버리느니 조금씩 사 먹는 게 백번 나은 줄 알면서도 습관이 그리도 무서운 거다. 주부 경력자의 화려한 일상 기술은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1인 가구가 대세인 이 시절에 어디다 마땅히 써먹을 데도 없었다. 필요하니까 익힌 기술이지만 그걸로 나머지 시간을 채워나가기도 싫었다. 앞으로의 삶을 위한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내친김에 아이들이 스무 살 될 때까지만 소임을 다하겠다는 나의 결심을 확실하게 알려둘 필요가 있었다. 나만의 은퇴 이유가 수북했지만 남들이 안 하는 일을 먼저 저지르려면 나름대로 치밀한 설득작업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막내의 고3과 재수 시절, 별로 도와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맘 놓고 놀기도 애매했던 그 시간에 나는 시간만 나면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다. 팔만대장경 급의 주부사직서였다. 엄마로, 아내로, 딸로 살아오면서 한번은 정리하고 싶었던 시간이며 감정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쓴 책이 2016년에 낸 『엄마난중일기』다. 북콘서트 삼아 엄마의 은퇴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한편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가족들이 제발 주방장 권력을 휘둘러도 좋으니 종신직으로 임기를 마치라고 주장하면 그땐 또 어쩐다지? 아 몰라. 그럴 땐 그냥 솔직하게 고백해야겠다. 내 인생 솥뚜껑 운전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가족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빈 둥지를 지키면서 늙어가기에는 남은 세월이 너무도 길지 않느냐고. 그런 마음으로 쓴 책이 2016년에 낸 『엄마난중일기』다. 엄마의 은퇴식이란 이름으로 지인들을 불러 북콘서트를 했다. 함께 사는 가족에게 과히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시점에 전업주부 인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전환을 맞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고민으로 적절한 시간을 기다려왔던가. 오십 고개를 넘는 나이였지만 마냥 좋았다.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천천히 걸어서 결국에는 왔으니까!   



이후부터의 내 삶은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혼자 생각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기도 하고, 강의도 하고, 협업도 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를 새록새록 배우고 있다. 비록 옛날보다 젊은 기운이 쇠하고, 주름과 흰머리가 늘고, 뱃살이 두둑해진 여자 사람이 되었지만 가족 관계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놓여나니 그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이제야 겨우 조금씩 ‘나’를 알아가는 기분이다.      


만나는 사람이 다양해질수록, 그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눌수록 내가 포용할 수 있는 세상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나만의 억울함에 휩싸여 있을 때는 남들 입장까지는 미처 헤아리지도 못했다. 엄마라는 강박을 내려놓고 나니 그제야 남편도, 딸도, 아들도 다 함께 각자 역할을 수행하며 인생을 함께 걷고 있는 동료처럼 보인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엄마 은퇴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다. 그 과정이 꼭 10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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