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끼리 특강
32년간 한 직장을 다녔던 친구가 은퇴를 했다. 결혼과 육아를 병행하며 임원 직급까지 버텨낸 그녀에게 물개 박수가 절로 나온다. 얼마 전부터 운영되는 동창 모임에서 이번 9차 ‘우리끼리 특강’ 주제로 그 친구의 30년 직장 생활 이야기를 듣고, 우리끼리라도 은퇴식을 해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밴드에 공지를 올리니 ‘은퇴도 없고 직급도 없는 줌마월드 입성을 환영’한다며 다른 친구들도 한바탕 법석을 떨어준다.
문득 몇 년전 병 때문에 명예퇴직 한다며 ‘이제부터 같이 놀아줘~’했던 옛 친구가 생각난다. 그땐 나도 미숙했던 것이…늘 무직과 백수 대열에 서 있으면서도 24시간 가족경영 최전선에서 업무 구분없는 뒷감당을 한참 하고 있었던 때였기에 그 친구의 그 ‘놀아줘~’ 소리가 참 거슬렸었다. '넌 이제 연금이라도 나오니 공식적으로 쉴 수라도 있잖아'하는 생각에 무급노동 전업주부인 내 처지가 슬쩍 억울하기도 했던 것같다.
그런데 몇년 만에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놀다보니 내 마음의 품도 많이 넓어졌나 보다. 이번에는 친구의 은퇴식에 참석하기 위해 중요 일정을 돈으로 대체하고 기쁘게 달려갈 준비를 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 사이에 나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펼쳐 나가고 있어서 좀더 너그러워진 것일 수도 있겠다.
은퇴 기념 특강 며칠 전, 몇몇 친구가 카톡방에서 머리를 맞댔다. 상장, 꽃다발과 케이크로 분위기를 돋우잰다. 또 일거리 맡을까봐 아는 척 안하고 카톡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도 자연스럽게 상장 제작은 나에게 낙찰되었다. 꽃다발과 떡 주문은 역시 모임장인 기애가 맡게 되었다.
그간의 오지랖 경력으로 모임 하나 운영하기가 얼마나 큰 일인 줄 아는 나는, 그 성가신 걸 마다 않고 솔선수범하는 친구가 매번 놀라우면서도 존경스럽다. 그 때문에 다른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동하는 게 아닐까? 아마 나처럼. 한 사람의 사랑과 헌신은 이렇게 더 큰 사랑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32년 재직했다고 서른두송이의 장미를 준비했단다. 빵보단 떡이라며 ‘축 줌마월드 입성’이라고 쓴 특별케이크도 주문해왔다. “은퇴하면 그리스 해변에서 비키니 좀 입고 어슬렁거려줘야 하는데…” 라면서 겨우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연옥이가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리스 와인을 들고 왔다.
나도 상장을 만드는데 전날까지 머리를 싸맸다. 창의력 많은 인간, 머리 뒀다 어디 쓰나. 이럴 때 쓴다. 책장을 뒤져보니 상장껍데기로 쓸만한 게 있다. 집안을 둘러보니 아직 작업실로 안 나간 포토샵 능력자가 있다. “바라바라~ 요케요케 두 장만 만들어라” 기본 문장만 정리해서 카톡으로 보내고 이 엄만 다른 일 해야 한다고 뺑소니. 딸이 궁시렁댄다. “참 뭐하느라 매일 바쁘신고 했드니만…”
딸에게 넘겨받은 상장을 들고 대망의 약속장소로 갔다. 점심값이 조금 비싸긴 해도 따로 강의 장소를 빌리는 게 더 비용이 드는지라 특강 아지트로 종종 애용되는 중국집이다. 미리 시간 내어 모인 친구들, 화기애애한 정담이 한바탕이다. 꽃다발과 상장이 수여되고 꿈을 담은 그리스 와인 한 잔씩. 떡케이크에 촛불도 불고 기념촬영까지 왁자지껄 하다.
32년 회사 생활 이야기를 특강으로 해야 하는 오늘의 주인공은 고민이 많았댄다. 그러면서도 경력이 묻어나는 PPT를 슬슬 장전한다.
1. 어떤 일을 했나?
2. 워킹맘의 삶, 일과 가정은?
3. 은퇴 전과 후
4. 남편의 은퇴 vs 나의 은퇴
참말로 청중이 궁금해하고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주제들이다. 암튼 얘네들의 숨은 재주와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끝이 날런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삶의 편린들, 너무도 잘 들었다. 개인적이면서도 솔직한 경험이라 필설로 다 옮기긴 쫌 그렇다. 다들 끄덕끄덕 공감하며 또다시 무한 물개박수로 끝.
점심식사가 들어오고 아줌마들 특유의 맥락도 없고 주제도 없는 다방면 왕수다가 질펀하게 안드로메다까지 오락가락이다. 사실 오십대 아줌마에게는 이 모든 것들과 연관이 없을 수도 없으니 일견 당연하달 밖에. 다음번 있을 모임 스케줄을 대충 정하고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났다. 가는 길엔 스마트폰 밴드에 모임 사진과 축하메시지가 또 한번 좌르르 디저트처럼 이어진다. 다음날 밴드에 올라온 주인공 양순이의 한마디 소감이 우리들 오지랖에 뿌듯함을 더해준다.
“친구들~~~ 모두모두 정말 정말 고마워! 고맙다는 말로는 너무 부족할만큼 감동이었어!!! 생각보다 빠른 은퇴로 섭섭함, 아쉬움, 두려움 등 복잡한 맘이었는데 친구들의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로 많은 힘을 얻은 것 같아~ 32송이로 의미를 더해주고, 줌마월드 입성 축하 메시지가 담긴 케익과 세상에 단 하나뿐일 꿋꿋상, 밴드에 남겨준 메시지까지 내가 이렇게 복이 많은 아이였나 싶은 생각에 어제 오늘 문득 문득 너무 행복했다! 준비해준 많은 친구들, 디자이너 정은이 딸, 함께 해준 친구들, 바빠서 못 온다며 따뜻한 메시지 남겨준 친구들… 너무 고마워!!! 우리 8155 모임 덕에 더 의미있고 행복한 3rd 라이프가 될 것 같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