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의 도시, 이타카
지난 주말, 뉴욕시티에 다녀왔다.
1박 2일짜리 짧은 일정으로 친구 집에만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친구의 남편과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와인을 쉬지 않고 마시며 그간의 밀린 얘기들을 나누었다. 시간이 좀 이상하게 작동했던 것 같다. 얘기 좀 했을 뿐인데 어째서 아침 7시가 되어 있는 거지?
이제는 정말 잡시다- 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정오가 지난 후에야 겨우 일어나서 씻고 정신없이 밥을 먹고 정신없이 버지니아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버지니아 집으로 돌아온 후 이틀 정도를 와인 숙취로 헤롱거리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늘 그렇듯이 지난 일정을 기록하기 위해 먼쓸리 플래너를 펼쳤다. (플래너를'플래닝' 하는 데 쓰지 않는 사람.. 나만 그런 건 아니겠죠.. 아니라고 해줘요)
실화냐..
아침 7시에 잠들었다.
부랴부랴 ----------
부랴부랴 이타카 - 까지 쓰고 흠칫 놀라서 얼른 수정액을 찾았다.
버지니아, 애쉬번으로 이사온지 꼬박 아홉 달이 지났다.
지난 12월 이타카 방문을 기점으로 이제는 정말로 내가 이타카를 마음에 묻고 떠나왔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드디어 애쉬번이 내 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탁 치면 줄줄줄 버지니아 집 주소가 나오고 벌써 이타카 집 주소는 곰곰이 생각해야 떠오를 정도가 됐다. 이타카에서 만난 친구들은 다시 없을 소중한 인연이고 여전히 그립고 만나면 눈물 줄줄 반갑구만 반가워요~ 이지만, 지금 내가 사는 이 곳 버지니아에도 친구가 생기면서 여기서 또 새로운 인연의 장을 열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젠 어디 사냐 물으면 노던버지니아-라고 바로 대답할 수 있는데.
그런데 아직도 내가 돌아갈 곳은 이타카인가보다.
친구들이랑 얘기하다가도 '집에 가면'이라는 표현을 쓸 때, 왜인지 자꾸만 '이타카 가면' 이라고 말하고 만다. 버지니아에 이사 온 후로 몇 번이나 그랬는지 모른다. 셀 수도 없다.
난 왜 계속 이타카로 돌아가는 걸까.
이젠 내 미국 고향이 이타카가 되어버렸나보다.
이때까지 내가 줄곧 미국 고향이라고 말해온 곳은 시카고다. 대학생 때 교환학생으로 1년 살았던 나의 아름다운 도시, 시카고. 서울에서 나고 자라 한평생 서울에 살다가 시카고에서 고작 1년 보내놓고 '미국 고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좀 우습겠지만 고향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언제나 그립고, 돌아가고 싶고, 떠올리기만 해도 아련해지는 장소. 적어도 미국에서는 내 고향이 시카고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만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저마다의 '미국 고향'을 갖고 있었다. 어떤 이는 뉴욕, 어떤 이는 필라델피아, 어떤 이는 보스턴. 장소는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그 곳에 각자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곳이라는 거였다. 짧은 여행이나 단기 연수 말고, 적어도 반 년 이상 살면서 일상 생활을 했던 곳. 한국에서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 삶을 처음 경험한 곳.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만큼 그 동안 살아온 세계가 완전히 뒤바뀌는 충격을 오롯이 감내하며 이겨내고 마침내는 적응해서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곳. 미국이란 나라의 첫 인상이 되고 미국을 판단하고 정의할 때 모든 기준이 되는 곳. 힘들었던 일, 나쁜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며 미화되어 아름답고 가치 있었던 추억으로 변하는 곳. 그 곳이 (나를 포함한) 그들의 '미국 고향'이었다.
그래서 이타카에 사는 5년 동안, 학위도 따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인생의 중요한 일이 많이도 일어난 곳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늘 "그래도 고향은 시카고지"라고 말해왔다.
떠나왔기 때문일까.
정작 그 이타카를 떠나온 지금에야 내가 돌아갈 곳, 마음의 고향은 이타카라고 말하게 되었다. 떠나왔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떠났기 때문에 비로소 안개가 걷힌 듯 마음을 또렷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리라.
앞으로 얼마나 더 지낼지 모르는 버지니아에서의 삶이 지나고 또 어디론가 떠나게 되면 그때는 내 고향 버지니아-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자석처럼 이끌려 돌아가게 되는 그리운 나의 미국 고향은 이타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