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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제니 Apr 26. 2023

시답잖은 일상을 나누는 일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제목 이미지: 네이버 웹툰 [독립일기] 94화 '친구의 결혼' 에서 발췌)




다들 두서없이 부담 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혼자 살기에 그럴 수 없거나, 가족의 생활시간대가 저마다 다르거나, 의미 있는 얘기만 하려다 지쳤거나 그런 거다. 사람들은 두서없는 대화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지지해 주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가까운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 속 깊은 진솔한 대화가 아니라 어젠 뭘 먹고 뭘 했나- 하는 시답잖은 일상을 나누는 일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희로애락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하루 하루가 모여 수일, 수주, 수개월이 되면 나는 그저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을’ 뿐이다. 결혼, 임신, 퇴사, 이직, 새 생명의 탄생, 혹은 누군가의 죽음과 같이, 크건 작건 인생을 흔들만한 사건이 몇이나 되는가. 다시 말해,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꼭 알려줘야지”라고 할 만한 사건이 얼마나 되냐는 거다.


절친한 벗들과 매일같이 만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와 전화를 주고 받으며 온갖 시시콜콜한 얘길 나누다가, 하다 하다 할 얘기가 떨어지면 화장실 가서 똥 누는 얘기까지도 낄낄거리면서 하던 어린 시절은 다 지나갔고, 이젠 가끔 생사확인차 카톡이나 주고 받으면 다행인, 그렇게나마 근근이 인연을 이어나가는 ‘현생’ 살기 바쁜 어른들이 되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고 짧은 시간 (대면이든 전화든 언제 끊길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카톡이든) 동안 얘기를 하려니, 어제 회사의 누구 때문에 열이 뻗쳤다는 -그래서 매일 느끼는 퇴사 충동을 어제도 또 느꼈다는-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거다. 한동안 전하지 못한 나의 근황을 짧은 시간 내에 전하려면 가급적 중요하고 임팩트 있는 ‘꼭 전해야 할만한’ 일들을 추려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 인터넷으로 산 바지가 배송돼서 입어봤는데 터무니 없이 작아서 화가 났다거나, 오늘도 뒷마당에서 여우를 봤다거나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시골에선 퍽 흔한 일이다) 하는 얘기는 어림도 없고 늘상 있는 업무 스트레스, 종종 일어나는 가족 간의 다툼 같은 것들도 ‘이런 걸 굳이 오랜만에 연락한 이 친구한테 해야하나?’하는 자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만다. 이 얘기는 너무 하찮아서 빼고, 저 얘기는 외려 너무 무거워서 제치고, 온갖 합당한 이유로 이런저런 일들을 잘라내고 나면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다. 


치열한 고민 끝에 하는 말은 “나야 뭐, 똑같지. 별 일 없이 살고 있다야”

여기에 사람에 따라 ‘그냥 회사 다니면서 살지’, ‘애 키우면서 살지’와 같은 말이 추가되기도 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나도 너무 잘 안다. 나도 그렇게 얘기해버릴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버리면 결국은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된 후로 각자 가정이 생기고, 나아가 어떤 이에겐 아이가 생기고, 책임져야 할 것이 늘어나면서,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가 그 모습 그대로 똑같이 유지될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멀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옛날과는 달라진 거리를 받아들이고 전보다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각자의 삶을 응원하면서, 그러다 또 한번씩 가까이서 의지하기도 하면서 지내는 게 성인이 된 후 우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당연함에 가려진 채로 서서히 멀어지다보면 어느 순간 너무 멀어져있어서 가까이 갈 엄두도 나지 않고 이젠 세월과 함께 흘려보낼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체념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일상’을 나누어야 한다. 거창한 사건 말고 시시콜콜한 우리의 일상을.


각자의 직업도 사는 모습도 환경도 모두 달라지고 난 후에는 ‘어떻게 사는지’를 알 노릇이 없다. 대충 멀리서 흐린 눈으로 보면서 뭉뚱그려서 어디 크게 아픈 데 없이 적당히 일하면서 적당히 잘 살고 있다는, 모두가 모두에게 내릴 수 있는 결론 말고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를 알고 싶다면, 정말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얘기해야 한다. 하루 일과가 어떤지, 가정과 회사의 분위기는 어떤지, 여가 시간에는 뭘 하는지, 요즘 친하게 지내는 이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소중한 친구인 ‘너’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리고 자세히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결국 모르는 채 흘러갈 수밖에 없다.


무척 가까이에서 나란히 걷던 친구와 언제 어디였는지도 모를 갈래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눠져 걷기 시작해 거리가 제법 벌어졌음에도, 마치 여전히 바로 옆에 있듯이, 지난주엔 누굴 만났고 어딜 갔으며 뭘 먹고 어떤 걸 했는데 너무 재밌었네- 하는 얘길 나눔으로써 우리는 벌어진 우리 사이의 거리를 한번씩 바짝 끌어당겨 좁힐 수 있는 것이다. 또 각자의 삶을 걸어가다가 조금씩 벌어지면 다시 한번 가까이 당기고. 또 한번 끌어당기면서.


그러니 그립고 소중한 이에게 연락해 물어보자.

“지난 주말은 누구랑 뭐하고 어떻게 보냈어?”











제목 이미지로 사용한 네이버 웹툰 [독립일기] 94화는 이런 장면으로 끝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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