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나는 10K 3회(2회인가?), 하프 마라톤 2회, 풀코스 마라톤 1회 참가(했으나 35km 지점에서 포기)했던 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 모든 기록들이 '꾸준한 달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점이 핵심이다.
달리기는 꽤 오래 전부터 '너무 하고 싶지만 사실 하기 싫은 것'이었다.
독서처럼.
나는 항상 책을 많이 읽는 애서가이고 싶고, 달리기를 즐기는 러너이고 싶었지만 책 읽기도 좋아하지 않아서 꾸역꾸역 의무감으로 읽고, 달리기도 꾸준히 하려니 괴롭고 힘들어 평소엔 하지 않으면서 어쩌다 충동적으로 덜컥 마라톤 등록을 해버리고 어찌저찌 결국 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렇게 억지로 읽던 책이 갑자기 너무 좋아졌고 (아직 애서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살다 보니 이렇게 달리기가 좋아지는 날도 왔다.
달리기 연습을 시작한지는 이제 약 한 달 반 정도가 됐다.
4월 중순부터 시작했는데, 늘 생각만 하던 달리기를 그제서야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 더 이상 댈 핑계가 없어져서였다.
이타카에 있을 때는 탁 트인 길도 없었을 뿐더러 크고 작은 언덕이 너무 많아서 달리기 초심자에겐 좋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며 뛰지 않았다. 몇 번 달리기를 시작해봤지만 꾸준히 하지 못하고 금세 그만뒀었다.
작년 여름 버지니아로 이사를 와보니 여기서는 정말 달려야겠다! 싶었다.
대체로 평탄한 지형에 길게 이어진 직선에 가까운 도로. 게다가 날씨도 따뜻한 편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군! 싶었지만 작년 여름부터 가을까진 박살난 멘탈을 부여잡고 근근이 하루 하루를 버티면서 그나마 꾸준히 해오던 홈트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나마도 함께 운동하는 동료들이 없었다면 다 그만뒀을 것이다. 동료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여하간 그 당시엔 새로운 걸 시도하고 도전할 여력이 도저히 없었고, 겨우 마음이 안정을 찾았을 때엔 겨울이 되었다. 더위보다 추위에 약한 내가 달리기의 첫 시작을 겨울에 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이렇게 아주 구체적이고 정당한! 핑계를 댈 수 있었는데,
올 봄이 되자, 그게 정말..
예..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고요..
세상이 참 좋아져서, 마음 먹은 자가 무언갈 하고자 하면 도저히 못 할 수가 없게 전폭적으로 도움을 주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그 중 운동 관련 앱, 러닝 앱은 정말 많다. (심지어 나도 그 많은 앱들 중 여럿을 이미 써보았다..!)
그 중 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앱을 골라서 설치하고 내친 김에 동기부여를 위해 미국에 있는 사람들 그룹을 찾아서 가입도 했다.
앱을 켜고 프로그램에 맞춰서 달리다보면 딱 지칠 때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성우가 외친다. "힘내세요!", "거의 다 왔어요!,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너무 멋져요!"
가장 쉬운 초보용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그간 꾸준히 여러 운동을 해온 덕에 체력적으로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 그만 뛰고 걷고 싶을 때는 성우가 이렇게 소리친다.
"지금 포기하고 싶은 그 나약한 몸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내세요!"
후.... 저 말을 들으면 화가 나서라도 계속 달리게 된다.
주에 2번 혹은 3번씩 꾸준히 달린지 6주가 지났다.
6주 동안 정말 신기하게도 달리기가 느는 게 느껴졌다.
프로그램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고, 그 프로그램도 그냥 봤을 때는 별 거 없어보였는데 꾸준히 하니까 는다.
달리기 실력만 느는 게 아니라, 매일 달리는 똑같은 길이 지겨워서 내일은 어디로 달려볼까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궁리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기쁘고 벅찬 것은 달리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는 일이다.
그 감정은 비록 달리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긴 하지만 적어도 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내 몸이 긍정과 자신감, 자기 확신으로 가득차는 게 느껴진다.
햇빛이 주는 축복일수도 있고, 아드레날린이 선사하는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건 어떤 도구도 없이 오롯이 내 몸 하나만으로 무언가-달리기-를 해내는 경험에서 오는 가장 원초적이고 실체적인 확신이다.
달리기에 미친 사람들이 왜 그리 중독되는지 조금 알 것 같달까.
아직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 를 느낄 수준은 아니라서 그건 또 다른 영역이겠지만, 달리는 동안 내 몸에, 호흡에 집중하게 되면서 서서히 잡념이 사라지고, 동시에 그 빈 자리가 자신감과 긍정, 희망으로 차오르는 그 기분.
그 기분 하나만으로도 당장 달리러 나가고 싶어진다.
내일도 모레도, 날씨가 좋기를 바란다.
덧.
정작 하루키의 책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훔치고 싶은 제목이라 여기에 갖다붙여보았다.
이 책을 여즉 읽지 않은 것에도 다 핑계가, 아니 아주 합당한 이유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얻어 소장한지 무척 오래 됐는데 아직도 읽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내가 언젠가 '진정한 러너'가 되었을 때 읽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가 달리는 사람이 아니면 하루키가 달릴 때 뭔 말을 하고 싶은지 내가 알게 뭐람? 유노? 안물안궁 이런 거 아니겠어?
그래서 언젠가 나도 달리기에 진심이 되면, 나의 최애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상은 달리기를 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러너 동지로서(?) 읽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