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는 달리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대충 씻고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어제 저녁 남은 것과 모닝빵, 그리고 믹스 커피 한 잔씩을 마신 후에 나갈 채비를 했다. 겨울 산행의 기본 중 기본은 레이어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속바지, 속양말, 속티셔츠부터 겉바지, 겉양말, 겉후리스, 마지막으로 바람막이까지 야무지게 껴입었다. 장갑도 속장갑, 겉장갑을 챙겼다. 커피 포트로 데운 물을 보온병에 가득 채우고, 커피 믹스, 핫초코, 핫팩, 귀도리, 헤어밴드, 털모자 등 보온을 위한 여러 물품도 빠짐없이 챙겼다. 아참, 크리스마스여서 귀여운 산타할아버지 모양의 귀걸이도 했다!
오전 7시 50분
힘차게 호텔 방을 나섰다. 모든 옷을 다 껴입었는데도 차 안은 작은 냉동고처럼 너무 너무 추웠다. 5분 정도 후에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매표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미국 내 모든 국립공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연간 이용권을 갖고 있어서 직원에게 카드를 보여주고 들어갔다. 매표소에서부터 주차장까지가 호텔에서 매표소까지보다 더 멀고 오래 걸렸다. 워낙 규모가 큰 곳이라 주차장도 여러 군데 있어서 하이킹 시작 지점과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오전 8시 20분
등산 스틱까지 챙기고 이제 진짜 시작!... 하려는데 아뿔싸... 호텔방 냉장고에 샌드위치를 두고 온 게 떠올랐다. 이걸 하이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알아차린 게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참 하이킹을 한 후에, 혹은 반환점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샌드위치가 없다는 걸 알았다면 절망적인 심경 말고도 탈진해서 위험할 수도 있었다.
시작부터 일이 꼬이다니.. 짜증이 호로록 났지만, 나는 이럴 때 화를 내기보단 차분하게 빨리 해결책을 찾는 편이다. (화를 내는 건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안 되니까요??) 호텔방에 돌아가서 샌드위치를 챙기고 매표소를 다시 지나오려면 이래저래 거의 1시간은 늦어질 것 같아서, 그랜드 캐년 국립 공원 내에 있는 수퍼마켓에 갔다. 공원 내에 있는만큼 값도 좀 더 비싸겠지만, 시간이 금이다.
오전 8시 54분
진짜 진짜 시작이다! 다시 출발!
몇 걸음 가지 않아 장엄한 그랜드캐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정수리까지 소름이 좌악 돋았다. 내 인생 세 번째 그랜드캐년이었다. 처음은 내 기억에 전혀 없는 (아마도 엄마에겐 고생스러운 여행으로 남아있을) 갓난아기 때의 방문이었고, 두 번째는 2018년 여름,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4인이 한 가족이었을 때였다. 그 사이 오빠도 나도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이제 난 새로운 내 가족, 남편과 함께 이곳에 다시 왔다. 엄빠오와 함께 왔을 때가 불과 5년 전이라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데도 완전히 새로운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이른 아침의 그랜드캐년에는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기념 사진을 찍기에 최적이었지만 우리는 사진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이미 샌드위치 사태로 30분이 넘게 지체된 후였다. Mather Point에서 우리가 하이킹을 시작할 South Kaibab Trail 입구까지도 1시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셔틀버스가 있었지만 시간 맞추기가 애매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오전 9시 43분
쉬지 않고 걸었는데도 50분이나 걸려 드디어 트레일 입구에 도착했다. 안내 표지판의 대형 지도를 보며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다시 한번 체크한 뒤 출발했다. 시작부터 뜨악 소리가 날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그때 찍은 동영상을 보니 내가 "이게 뭐지?"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파른 산이 아니라 수직 절벽을 내려가는 거니까 경사가 말도 안 되게 가파를 수밖에.
오전 10시 5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OOH AAH point에 도착했다. 이름부터 '우아' 포인트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트레일 초입에서부터 시야 정면에 절벽이 반쯤 걸치고 있었는데, 그 절벽에 끝나고 정면으로 그랜드캐년의 절경이 180도 파노라마 뷰로 펼쳐져 보이는 포인트가 바로 이 '우아 포인트'다. 눈으로 그 광경이 입력되자 입에서 자동으로 "우아~"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주 직관적인 네이밍이군요! 내려가던 사람들과 올라오던 사람들이 모두 이 우아 포인트에 멈춰서 사진도 찍고 휴식도 취하느라 좁은 절벽 끄트머리가 제법 붐볐다.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보니 까마득한 절벽이다. 초반 경사가 정말 엄청나게 가팔랐다. 우리도 잠깐 멈춰서 셀카 몇 장을 찍고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섰다. 출발이 많이 늦어졌으니, 부지런히 내려갔다가 올리올 때 제대로 사진을 찍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