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남편이 여행 전 아픈 게 처음이 아니었다.여행 전에 혹은 중에 아파서 여행을 제대로 못한 적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여행 전날 허리를 삐끗해서 호텔비 통째로 날리고 여행을 취소한 적도 있었고, 여행 직전에 감기에 걸려서 내내 골골거린 적도 있었고, 제주도 여행을 가서는 첫날 또 허리를 삐어서 일주일 내내 물리치료를 받기도 했었다.
참.. 아픈 사람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또 당사자는 안 그래도 속상할 텐데 몸까지 아프니 얼마나 화가 나겠나 싶지만,
사실 화는 내가 제일 많이 났었더랬다.
자주 가지도 못하는 여행 오랜만에 간다고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가, 계획한 것도 다 어그러진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게다가 간병까지 해야 하니 솔직히 말해서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엔 화를 내봐야 뭐 하나, 이미 다친 거, 아픈 거, 화낸다고 낫는 것도 아니고 괜히 서로 기분만 상하지 싶어서 화도 못 냈다.게다가 아파서 골골거리면서 나한테 미안해하는 모습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다 돌아서면 나는 그 모든 상황에 다시 화가 나고. 찬바람 쌩쌩 부는 내 모습에 남편도 결국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부딪히기도 했었다.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나니 여행 일정이 생기면 그전부터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모른다. 이번에도 또 가기 전에 아프면 어쩌나, 남편 컨디션이 어떤지 눈치 보면서 전전긍긍한다.
그런데! 또! 아픈 거다.
그랜드캐년 여행인데!!! 그렇게 기대하던 그랜드캐년 하이킹을 앞두고 있는데!!!!!
다행히 심하게 아픈 건 아니었고 출발 이틀 전쯤인가부터 약한 감기 기운이 있다고 했다.
당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여행 준비는 쉬는 것이오..
결국 아주 아프지도, 그렇다고 아주 쌩쌩하지도 않은 애매한 컨디션으로 출발했다.
이른 아침 비행기여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 남편에겐 평소보다 옷도 따뜻하게 입으라고 당부했고 남편도 군말 없이 여러 겹 껴입었다. 공항에서부터 계속 마스크도 끼고, 남편은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들어서 5시간의 비행 내내 잘 잤다.
피닉스 공항에서 렌터카를 픽업하고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애플비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옆 코스트코에서 물과 맥주를 샀다. 여행지에선 어딜 가나 물과 술이 비싸니, 여행 내내 마실 것들을 대용량으로 싸게 장만했다.
이제 그랜드캐년 숙소까지 쭉 달려보자. 차로 약 3시간 반 정도 걸릴 예정. 대단한 장거리 운전은 아니지만 보통 이 정도 거리면 둘이 한번 교대하면서 운전하는데, 이번에는 나 혼자 다 했다.
내가 숙소까지 내리 운전할 테니 당신은 옆에서 푹 주무쇼, 그래야 컨디션 회복하지!
남편도 계속 미안해하면서 그러겠노라고 내게 양해를 구했다.
여담인데, 나는 장거리 운전 할 때 남편이 옆에서 자고 있는 게 제일 좋다. (하하하)
아주 혼자 하면 심심하기도 하고 졸릴 때 위험할 수도 있고, 그런데 옆에서 깨어 있으면 계속 얘기도 나눠야 되고 뭐랄까 아무 얘기 안 하면 오히려 적막하달까?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으면 조용하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혼자 드라이브하는 느낌이 난다. 여차하면 깨울 수도 있고!
남편이 컨디션이 정말 안 좋긴 했던지, 정말 내내 잤다. 피닉스에서 쉬지 않고 북상하는 동안 창 밖 풍경도 계속 달라졌다. 점차 황량해지고 흙빛이 진해지는 풍경이 끊임없이 탄성을 자아냈다. 그 멋진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고 기절한 듯이 자는 남편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부부란 이런 거겠지.
해가 완전히 다 지고 거의 밤 9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그랜드 캐년 초입으로부터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Tusayan이라는 동네에 잡았다. 가로등도 잘 없는 황량한 길을 몇 시간 달려오다가 드디어 번화가로 들어오니 눈이 부실 정도였다. 가로수에는 온통 크리스마스 전구가 감겨 있었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도 있었다. 동네 자체가 그랜드 캐년에 의한, 그랜드 캐년을 위한 곳이다. 숙박시설이 많이 있고 식당 몇 군데와 까페 등의 편의 시설, 그리고 그랜드 캐년의 장엄한 모습을 항공 뷰로 감상할 수 있는 IMAX 극장도 있다.
부랴부랴 체크인을 하고 밥 먹을 곳을 찾아보았다. 밤 9시가 넘은 데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니 문을 연 식당이 몇 없었다. 개중 제일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 갔더니, 식당 입구에 대기 인원이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빠르게 포기하고 돌아나가서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부리또와 샌드위치, 수프 정도의 간단한 음식만 취급하는 식당으로 편의점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저녁을 먹고 편의점에서 감기약과 내일 하이킹 중에 먹을 샌드위치를 사서 돌아왔다.
오는 여정 내내 잠을 잤던 덕분인지 남편의 컨디션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내일 아침에 바로 그랜드캐년 하이킹이다. 원래 계획은 하루 종일 하이킹하는 것으로 10~12시간 하이킹을 할 예정이었으나, 남편 컨디션을 봐서 적당히 대여섯 시간만 하고 올라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일 괜히 무리했다가 그랜드 캐년 이후의 남은 일정들까지 완전히 망칠 수 있으니 컨디션을 스스로 잘 판단해서 절대 몰아붙이지 말고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내려갔다 오자고 했다.
수억 년을 이 자리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던 그랜드 캐년이, 고작 우리의 수십 년 인생 동안에 없어질 리 없으니. 언제든 다시 오면 되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배낭과 옷을 모두 챙겨놓고 (남편은 감기약도 챙겨 먹고) 잊지 않고 알람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